볼마스타인 평원 회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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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배움이란 없는 녀석들이군요.”

저 너머 평원에 펼쳐진 드라그노트 군의 진형을 보며, 가름은 냉소를 날렸다그 옛날 아르마인 왕국을 꺾었을 때 이후로, 제국의 전가의 보도와 같은 전술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단단한 중장보병으로 적의 전진을 막고, 노출된 배후를 강력한 기병으로 공격한다원시적이고 치명적인 일방적 돌격 전술로부터 시작하여 시간을 걸쳐 연마, 이제는 제국을 상징하게 된 기병대를 중심으로 한 전술은 자국민에게는 자랑으로, 그리고 타국인들에게는 공포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그와 같은 전술로 제국은 지금까지 대륙의 패자 지위를 독점해 왔다하지만 제국은 그 전술을 너무 오래, 그리고 안이하게 과신하며 사용해 왔다수많은 패배를 경험하며, 주변 국가의 무장들은 무적으로 보이는 제국의 전술을 파훼하기 위해 수많은 연구를 해 왔다가름 역시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영원해 보이는 무명 (武名)이라도 언젠가 역사의 한 곳에 멈춰설 때가 온다. 천리를 가는 말도 언젠가는 그 힘이 다 해 그 자리에 스러질 때가 오고야 만다대륙 전토에 용명을 떨치며 전토를 달려온 드라그노트 제국 기병대라도, 언젠가는 그 힘이 떨어져 멈춰설 때가 온다. 그리고 그 때, 오랜 시간을 들여 연마한, 그 때를 위해 준비된 무자비한 칼날은 힘이 다한 말과, 그 기수의 목을 망설임 없이 베어 떨어트릴 것이다

그리고 가름은, 그 때가 바로 오늘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결국, 자네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가름과 말머리를 같이 한, 노장군이 말을 걸었다풍성한 백발은 역시 하얀 눈썹과 함께 그의 이마와 눈을 가리다시피 하고 있었다하지만 머리칼에 숨겨진 가운데, 형형한 눈빛은 가름만큼 예리하게 전장을 꿰뚫어보고 있었다제국의 진형에서는, 그들의 주력인 기병대에 대한 자신이 가득하다는 것을, 그리고 이번의 전투에서도 그들은 기마대를 중심으로 한 전술을 사용할 것이라는 것을 노장군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눈빛은 이윽고 옆에서 말을 타고 있는 젊은 장군에게 향하며, 감탄의 색을 더했다이 볼마스타인 평원에서 대치하기 전 벌어졌던 몇 개의 소규모 전투에서, 기병대에 약한 모습을 연출하며 패배를 연출, 저와 같은 진형으로 드라그노트 군을 유도한 것은 옆에 있는 젊은이었다이 젊은이는 그가 지금까지 지냈던 오랜 군 생활 중, 가장 심리전에 능한 남자였다.

“아닙니다, 길다스 장군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일단 가름은 고개를 숙였다이런 칭찬을 받았을 때는 너무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담백하게 겸양을 떠는 것이 이 노장군에게는 가장 효율적이라는 것을 가름은 잘 알고 있었다같은 아르마인 왕국의 대장군, 이른바 시벤 플뤼겔 (일곱 개의 날개)로 일컬어지고 있지만, 가름과 길다스의 사이에는 오랜 시간의 군 경험과 함께, 그 경험과 함께 발생한 많은 수의 인맥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아르마인 왕국의 건국 신화에서는 일곱 개의 날개를 가진 천사가 등장한다. 건국왕에게 불타는 검을 넘겨준 천사는, 건국왕이 그 검을 들고 아르마인 왕국을 건국한 이후에도 하늘 위에서 왕국을 보살피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그 일곱 개의 날개를 상장으로 하여 만들어진 제도가, 현재 아르마인 왕국에서 최고위의 군권을 가진 일곱 명의 대장군, 시벤 플뤼겔이다

시대를 지나며, 일곱 명이라는 숫자를 넘거나 넘지 못하거나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 일곱 명의 대장군은 때로는 서로 경쟁하고, 때로는 서로 협력해가며 아르마인 왕국의 세력권을 넓혀 나가는 데에 커다란 역할을 해 왔다긴 역사 속에서 주변 국가들과의 대부분의 싸움은 제국과의 것이었다 투쟁 속에서 시벤 플뤼겔의 이름은, 제국의 무명에는 약간의 손색은 있을지언정 대륙을 대표하는 이름 중의 하나였다.

가름의 나이는 올 해 스물 넷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시벤 플뤼겔로 발탁되었다왕국의 귀족 자제로, 소년기를 갓 벗어난 나이에 군대에 투신, 당시 나라 안에 횡행하던 도적단을 단기간 내에 토벌하고, 여러 개의 주변국을 아르마인 왕국에 병합시키는 대활약을 펼쳐, 그는 말석이나마 역대 최연소 대장군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물론 이 자리에 자신을 추천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가름은 자신이 이 자리에 올라온 결정적인 이유는 본인의 재능과, 그에 걸맞는 무훈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하지만 실적과 재능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너무나 젊은 나이에 높은 자리에 올라간 만큼, 그를 선망하는 사람의 몇 배는 그를 질투하며 시기하고 있었다가름에게 신망을 보내는 사람만큼 그의 실패를 바라는 사람도 있었으며, 그에게 가진 시기심이 큰 사람일수록 그 자가 가진 권력이 비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름은 잘 알고 있었다. 굳이 이런 자리에서 잘난 척을 하면서 그 자들에게 빌미를 줄 필요는 없다. 게다가 길다스는 가름을 경원시하는 세력과 가까이 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길다스 폰 다이버그나이는 63일반 창병으로 시작하여 대장군의 지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시벤 블뤼겔의 구성원들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수수한 기량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보다 나이가 한참 어림에도 시벤 블뤼겔의 수장 역을 맡고 있는 다리온 경이나, 기타 다른 구성원들에 비하면 무용이나 책략에는 손색이 있는 편이라고 평가를 받고 있었으나, 오랜 군 생활이 쌓이며 얻어진 탄탄한 경험과 기술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실제로 이미 나이가 지긋히 들은 그가 마음먹고 휘두르는 단창을 받아내기만 해도, 그 자는 범상치 않은 실력의 소유자라는 평가를 듣는 것이다

노련함과 견실함으로 왕국 최고의 무장의 자리에 앉은 남자다아무리 가름이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더라도, 오랜 세월 동안 쌓아놓은 노련함은 무시할 수 없다게다가 이 남자는 자신의 반대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점을 표현하지 않았다언제나 냉정하게 가름이 입안한 작전을 고려하고, 좋은 작전이라고 했을 때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채택했다실제 마음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으나, 공적으로나마 공정하게 자신을 평가해주는 상사는 결코 흔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가름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이 군대의 총지휘관은 길다스이며, 자신은 부지휘관에 지나지 않는다만약 이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대부분의 군공은 길다스에게 돌아가지만, 가름은 그것이 아깝지는 않았다길다스는 공정한 사람이었으며, 이 전투의 작전을 입안한 자가 누구인지도 잘 알고 있고, 또 그것을 잊어버릴 사람은 아니었다자신은 여기서 길다스에게 공을 양보하며, 그의 신뢰를 얻으면 된다.

언젠가 그를 밟고 올라설 때까지.

“녀석들은 우리가 상정한 대로 공격해 올 것입니다저희는 그저 장단에 맞추는 것처럼 보이기만 하면 됩니다.”

가름의 말에 노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녀석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수 있겠군.”

노장군의 눈썹이 힘차게 꿈틀거렸다.

“우리 아르마인 왕국은 이 땅을 손에 넣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해 왔다그에 반해 제국은 이제서야 부랴부랴 전력을 편성했지그리고 녀석들은 모르는 새 이 전장으로 유인당해 왔다우리가 저들의 전법에 준비를 해 왔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허리에 매어져 있는 단창에 가져간 손에 힘을 주며, 노장군은 자신있게 말을 이었다.

“녀석들에게 있어 가장 큰 패배 요소는 자만심이다.”

가름은 순간 노장군의 눈이 빛난 것처럼 느껴졌다.

“녀석들은 건국 이래 수많은 승리를 쟁취해 왔다그리고 그 와중에 우리 아르마인 왕국은 안타깝지만 몇 번의 패배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지하지만 그 승리들 때문에 녀석들은 오만해졌다전술의 변화도 없이, 그저 해 왔던 대로만 하면 이길 것이라고 믿고 있지하지만 우리는, 패배들 덕분에 녀석들을 공부할 수 있었다물론 자네의 전략 덕분에 녀석들을 여기로 몰아넣을 수 있었지만결국 녀석들의 숨통을 끊는 것은 스스로의 자만심 때문일 것이다.”

가름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노장군의 예리한 독설은 단순히 드라그노트 군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가름 스스로를 가리키는 것처럼도 여겨졌기 때문이다

가름 역시 본인이 가지고 있는 단점 중 하나가 스스로에게 품은 자신감, 혹자에게는 자만심으로 보일 수 있는 높은 자존심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결코 시벤 플뤼겔의 말석에 만족할 남자는 아니었다그리고 오랜 경험을 가진 눈 앞의 노장군은, 젊은이의 가슴 속에서 점차 크기를 키워가는 야심을 눈치채고 있었다야망에 넘치는 젊은 후배에게 나름의 방법으로 경고를 해 준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가름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옳으신 말씀.”

가름은 노장군에게 목례한 채, 본인의 작전 지역으로 말의 머리를 돌렸다.

언젠가는 넘어서야 할 상대지만, 지금은 좋은 상사다.  거스르지 않고, 일단은 눈 앞의 전투에 충실하게 임하는 것이 먼저다

야심은 앞으로 가속하기 시작할 것이다그리고 야심을 실현할 시간은 충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단 이 전투를 성공으로 이끌고 나서부터인 것이다.

그리고 가름은 자신의 성공을 확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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