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마스타인 평원 회전 (3)

 


3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 이슈트반 백!”

대기를 진동시키는 것 같은 목소리가 천막 안을 가득 채웠다.  천막 안에 있던 지휘관들의 대부분은 그 목소리에 작게나마 몸을 움츠렸다.

최고 지휘관 용의 대형 천막, 탁상 위에 전장의 지도를 펼쳐놓은 채, 전투 전 작전의 최종 점검을 하고 있는 자리이다.  그 가운데, 쩌렁쩌렁한 고함이 터져나온 것이다.  고함의 주인공은 부리부리한 눈에 비웃음을 담아 신을 노려보았다. 

그의 이름은 벨가디쉬.  현 제국 내 최고의 무위를 자랑하고 있는 드라그노트 군의 대장군이다.  곰과 같은 거구를 감싸고 있는 갑주에는 수많은 상처가 새겨져, 그의 전력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그의 형형한 눈빛과 그 큰 몸집이, 그가 애용하는 대검을 종횡무진 휘두르며 전장을 내달리는 모습을, 적과 아군은 각각 두려움과 경외를 담아 이렇게 불렀다.

훔바바 (공포의 괴물) 벨가디쉬.

길게 기른 턱수염을 한 손으로 매만지며, 벨가디쉬는 그의 큰 목소리를 다시금 천막 내에 울려퍼지게 했다.

“여태까지 온 전투에서 아군은 계속된 승리를 거두고, 그 결과 적들을 이 평원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이 평원은 우리 기병대가 가장 큰 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지.  이제 남은 것은 전진하여 적을 섬멸하는 것 밖에는 없다.  지금 공은 우리에게 이 호기를 그냥 허공에 던져버리라는 건가?”

“그몰아넣었다라는 것이 석연치 않다는 것입니다. 벨가디쉬 장군.”

신은 조용히 대꾸했다.

“아직까지 적과 우리는 제대로 교전한 적이 없소. 아까 경은승리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그들은 싸우는 척만 하고 도망쳤을 뿐이오. 시벤 플뤼겔 중의 두 사람이나 적군을 지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적들은 이 평원에 와서야 제대로 된 진형을 갖추고 우리를 맞이하고 있소.  마치 이 평원에서의 전투를 준비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은 녀석들이 겁쟁이들이기 때문이다.”

벨가디쉬는 으르렁거렸다.

“우리 드라그노트 제국에서는 겁쟁이들에게 끌려다닌 역사는 없다.  우리와 검을 맞댄 자들도, 우리에게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자들도 모두 우리의 검과 창으로 부술 뿐이다.  겁쟁이들에게 농락당해 싸움을 멈추는 비겁자는 우리 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몇 개의 비웃는 듯한 눈빛이 신에게로 날아들었다.  신에게는 익숙한 눈빛이다.

“지금 저를 비겁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신의 반문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듣고, 벨가디쉬는 입꼬리 한 쪽을 올렸다.

“그럴 리가.  우리 크라슈토룸 (붉은 질풍) 군단만큼이나 명망이 높은 기병대의 지휘관 아닌가, 이슈트반 백은.  나름 검솜씨도 좋다고 들었는데, 그런 비겁자일리가 없지.”

탐욕스러운 눈초리가 신의 허리춤을 훑었다.

“이슈트반 공이 차고 있는 그 명도 역시 주인에 어울리는 검이 아니겠는가.  적들의 허세에 눈이 어두워져,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인데도 시작하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어울리는 검이 아니지.”

신이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은 그가 어렸을 적, 이 대륙으로 건너오며 가져온 검이다.  그는 자라나며 이 검을 결코 멀리 떼어놓지 않았다.  동방 특유의 예리함과, 그 예리함을 표현한 듯한 소박하고 단아한 애도(愛刀)의 아름다움은, 신의 명성이 제국 내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함께 그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신의 출신 때문에 그를 경시하는 자들도, 그가 가지고 있는 검에는 탐욕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검의 수집가로 알려져 있는 벨가디쉬 역시, 신의 검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벨가디쉬의 비꼼을 신은 받아쳤다.

“몇 십년, 몇 백년이 지난 전술을 적이 몇 십년, 몇 백년동안 계속 당하리라 생각하는 것은 기본적인 상상력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필부가 장작을 패더라도 스스로의 기술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는 것, 아무런 고민 없이 같은 전술을 같은 적에게 되풀이하는 것이야말로 게으름. 신중함과 비겁함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의 남자가훔바바라는 이름을 달고 5만 군대를 지휘한다니, 적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면, 결코 시벤 플뤼겔을 두 명까지 파견할 필요도 없을 터입니다.

“뭐라고?”

벨가디쉬의 한쪽 눈썹이 힘차게 치켜올려졌다.  본인의 무위나 위치로 보았을 때, 자신이 남을 모욕하는 일은 많았지만, 반대로 자신이 모욕을 받은 일은 그다지 없었던 것이다.

“말 하나는 잘 하는구나, 어디, 실력도 그 말솜씨만큼인지 보여줄 수 있겠나?”

위압적인 말에도 신은 물러서지 않았다.  둘 사이의 공기는 점점 팽팽해져 왔다.

벨가디쉬는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모르는 이 원…”

벨가디쉬는 말을 삼켰지만, 신은 그가 끝맺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원숭이’. 

신이 태어났던 동방의 대륙 태생들에 대한 멸칭이다.  아직 신이 새로운 땅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을 때, 자신의 뒤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던 단어이기도 하다.

신은 결코 인격자는 아니었다.  아무리 대장군이라고 해도, 눈 앞에서의 행해진 모욕, 그리고 육체적인 위협을 무마할 수 있는 도량은, 지금까지의 신에게는 갖춰져 있지 않았다.  벨가디쉬의 위협에 물러나지 않고 몸을 살짝 앞으로 굽혔을 때, 천막의 한 가운데서 들려온 목소리가 팽팽한 공기를 누그러트렸다. 

“거기까지.”

신과 벨가디쉬는 이제야 생각난 듯,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대장군으로서, 드라그노트 군 알텐하겐 원정대 안에서 벨가디슈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지위와 전력 (戰歷)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 원정대의 총 지휘관은, 지금은 그가 아니었다.

온화한 목소리의 주인은 두 사람을 조용한 목소리로 타이르기 시작했다.

“대장군, 그리고 이슈타르 백, 지금은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지 않소.”

“송구스럽습니다. 황태자 전하.”

“송구스럽습니다, 전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들을 타이른 사람은 바로 이 원정대의 총 지휘관이자, 드라그노트 제국의 황태자의 위치에 있는 알베르트 대공이었다.

현 나이는 35.  알렉산드르 황제의 두 번째 아들이다.  맏형이었던 제랄 황태자가 병사한 후 황태자의 자리를 이어 받은 지 10여년, 황제의 치세가 워낙 긴 탓에 그 역시 황태자로 지낸 기간이 꽤 되었으나, 나이 든 상태에서 지위를 이어받았기 때문인지, 국정의 여러 자리에 참여하여 현명하게 운영을 해 오고 있었다.  전쟁의 경험은 있긴 하지만, () 보다는 문()에 치중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신과는 같은 황립 학원에서 수학한 사이로, 또한 신의 여동생인 리나테아의 약혼자이기도 했다.  

황태자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온화한 어조로, 하지만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중요한 전투가 시작되기 전의 마지막 순간에, 지휘관들이 전술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병사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문제가 있었으면 조금 더 일찍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는가, 이슈트반 백?”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신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확실히 너무나 늦은 감이 있었다.

“…게다가, 벨가디쉬 장군이 이야기한 대로, 이 전장은 우리의 주력이 가장 큰 역량을 발휘하기 쉬운 장소이다.  적들이 일부러 이 곳을 골랐다고 보기는 힘들지 않은가?”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황태자의 부드럽지만 예리한 힐난은, 벨가디쉬가 아닌 신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은, 오히려 그런 점이 황태자가 자신을 신경써주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태자와 자신의 여동생이 혼례를 올리게 된다면, 좋거나 싫거나 이슈트반 백인 신은 외척이 된다.  신의 행동과 야심에 따라, 황가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특히나 다른 귀족들로부터 이방인 (가끔씩은 원숭이’) 취급을 받는 신이 그와 같은 존재가 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그에게 비우호적인 시선이 더욱 강해질 것이 뻔하다.  황태자는 그런 시선으로부터 신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신에게 조금 더 엄격하게 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에게 드리워진 좋지 않은 예감은, 황태자의 꾸짖음으로는 해소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하, 이 전장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옵니다.  이번 전투에 참여하고 있는 시벤 플뤼겔의 신예 가름 장군은, 그 지략이 보통이 아니라고…”

그깟 계략 따위 얼마든지 쳐부술 수 있는 만큼의 기량이 우리 군에는 있다!”

벨가디쉬가 일갈했다.  그는 황태자를 향해 이야기했다.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아시는 대로 승기는 우리 군에 있습니다.  전하에게 남은 것은 돌격 명령을 내리시고, 그에 따라 약속된 승리를 쟁취하는 것 뿐입니다.  이제 와 확인되지도 않은 억측으로 우리 군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것은 반역과도 같은 것 아니겠사옵니까.”

“…대장군, 그 말은 조금 지나치지 않소?”

송구하옵니다.”

벨가디쉬의 눈은 신을 향해 빛났다.

소신의 아룀이 조금 지나쳤던 것 같사옵니다.  하지만 이슈트반 백은 아무래도 이 전투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사오니, 현재 편성되어 있는 진형을 조금 변경하여, 이슈트반 백의 부대를 2진으로 물리고, 소신의 부대장과 교체하여 포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다면 조금 뒤에서, 이슈트반 백은 전세를 조금 더 관망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련지요.”

겁쟁이는 뒤로 물러나 승리를 구경이나 하라는 이야기인가 신은 그런 의미라고 확신했다.  벨가디쉬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전공의 아주 작은 부분조차 신에게는 남겨주지 않겠다라는 의미이다.  전체 군 5만 중 신의 부대는 기병대 2, 그리고 보병대 3천이다.  신의 부대를 뒤로 물리더라도, 전체의 포진은 그렇게 변하지 않는다.  어차피 주력 부대는 벨가디쉬가 이끄는 크라슈토룸 기병대 1만인 것이다.

어쩌면 벨가디쉬가 처음부터 노렸던 것은 이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신을 도발하고, 황태자로 하여금 신을 지적하게 하여 본인이 원하던 포진을 완성하는 것이다.  신을 제외한 다른 지휘관들은 모두 벨가디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만이 벨가디쉬가 던져주는 전공의 배분을 독점할 권리가 있었다. 

최고 지휘관은 분명 알베르트 황태자이지만 누가 보아도 이 전쟁의 그림을 그리는 자는 벨가디쉬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를 그 그림에서 빼 버리고, 그 안에서 본인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생각보다는 간교한 인물이 아닌가.’

겉모습으로 상대방을 판단하면 안된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신은 뼈아프게 깨우쳤다.  눈 앞에 있는 거구의 대장군은 그 몸에서 뿜어나오는 힘만이 아닌, 약삭빠른 지략 역시 갖추고 있는 인물일 것이다.

황태자는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신을 감싸는 일은 더욱 할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는 없었다.

“…대장군의 말 대로다.  이슈트반 공은 한 걸음 물러나, 2진에서 전황을 지켜보는 것으로 한다.”

존명!”

“…존명.”

벨가디쉬는 고개를 숙였다.  신 역시 고개를 숙이며, 황태자의 말에 따랐다.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막 안에 모인 제장들을 향해 이야기했다.

일단 작전의 확인은 이 정도로 해 두면 좋을 것 같소.  모든 지휘관들은 각자 자기의 부대로 돌아가 최종 전투 준비를 시작하시오. 대장군이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돌격하여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오.  용의 피가 우리를 영광으로 이끌리라!”

용의 피가 우리를 영광으로 이끌리라!”

드라그노트 군에 오랫동안 전해져온 구호를 외치며, 지휘관들은 하나 둘 씩 천막 바깥으로 나갔다.  신은 모든 지휘관들이 나갈 때 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벨가디쉬가 나가며, 비웃는 듯한 시선을 신의 등에 던졌다.

“…너무나 마음을 쓰지 말게.”

둘만 남았을 때, 알베르트 황태자는 신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의 신중함은 잘 알고 있지만, 대장군이 말한 대로 이 전장은 우리에게 너무나 유리하다.  과한 걱정을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섣불리 입 밖에 내는 것은자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어.”

송구스럽습니다.”

신은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자신에게 상황이 불리해지는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 때문에 황태자를 불리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절대로 피하고 싶은 일 중의 하나였다.  황태자의 자리에 올라 있지만, 알베르트 황태자에게는 많은 형제와 친척이 있고, 그 중에는 야심에 불타며 언제고 알베르트를 그 자리에서 밀어낼 궁리를 하고 있는 자 역시 있을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신이 오히려 빌미를 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알았다면 됐네.  나가서 준비를 하게나.  오히려 멀리서 전장을 보게 되면 새롭게 배울 수 있는 것도 있지 않겠는가.”

황태자는 온화하게 웃으며, 신이 걸치고 있는 외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신은 깊게 목례를 하고는 천막을 빠져나왔다.

약한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그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사고는 천막 한 가운데 놓여 있던 탁상 위, 볼마스타인 평원의 지도를 떠올리고 있었다.

적과 아군의 병력 수는 초기에는 양 쪽 다 5만이었으나, 이 전투 전 교전으로 적군이 도주하여 그 수는 드라그노트 군 5만 대 아르마인 군 4만으로, 수는 제국이 우세하다.  그리고 전장인 볼마스타인 평원은 그들이 맞붙기에는 딱 맞는 크기의 넓이를 가지고 있었다.  주변은 탁 트여 있으며, 평원을 둘러싼 언덕은 절벽에 가까울 정도로 가파른데다 나무가 우거져 있어 공격해 내려올 수가 없다.  그렇기에 벨가디쉬는 승리를 자신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도에 그려진 언덕의 존재가 신의 머리속에 깊게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자신의 천막에 돌아온 신은 곧바로 카이유르를 소환했다.

카이유르, 카이유르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

내 걱정이 맞다면 중요한 일이지만, 걱정이 기우로 끝난다면 매우 부끄러운 일이죠.”

카이유르는 씩하고 웃었다. 군신관계가 아닌, 동료 시절에 자주 보여줬던 장난기 넘치는 미소다.

괜찮습니다. , 그렇게 된다면 부끄러움은 백에게 에누리 없이 넘겨드릴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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