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마스타인 평원 회전 (4)

 



4

겨울의 햇살은 잘 벼려진 수만의 창날에 베여 흩어지고, 박자를 맞춘 군화 소리는 평원 전체에 울려퍼졌다. 2페르츠 (200미터) 정도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양 군은 살의를 담은 눈빛을 저 편 적에게 향한 채 각자의 진형으로 포진했다.

드라그노트 군 5, 아르마인 군 4.  제국이 자랑하는 크라슈토룸 기마병단은 방추형 진을 준비한 채 진형의 양 옆에 포진했다.  원래 계획은 벨가디슈 대장군이 우익에, 그리고 신이 좌익에 위치하여, 중앙의 창병대가 적을 저지하는 동안 양 옆으로 우회하여 적을 포위하는 작전이었으나, 황태자의 명령으로 신은 2진으로 후퇴, 벨가디슈의 충직한 부하인 바즈노크 장군이 그 자리를 메꿨다.  바즈노크가 맡은 좌익은 벨가디쉬의 크라슈토룸 병단이 적에게 강력한 공격을 가하는 동안, 그 반대편에서 압박하는 역할을 맡는다.  바즈노크 역시 노련한 장군으로, 그 실력은 우습게 볼 수 없다.  크라슈토룸의 거센 공격을 어찌 버텨내더라도, 뒤에서 밀려오는 기마대의 압박, 그리고 두터운 중장보병대가 만들어내는 벽에 갇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적병들이 그들자신의 피로 창과 검, 갑옷의 밀실을 채워왔던 것이다.  

아르마인 왕국은 그에 맞서, 중앙이 후위에 위치하고, 중장보병과 보병대를 역삼각형으로 길게 배치, 사이사이에 궁병대와 기병대를 배치한 진형으로 맞섰다.  기마병만의 위력으로 따지자면 현재 대륙 내에 드라그노트 제국과 비견될 만한 군대를 가진 국가는 없었다.  그렇기에 제국 주변의 국가들은 어떻게 하면 제국의 기병대를 무력화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이를 갈며 연구해 왔다. 그 방법 중 하나로 꼽혔던 것이 지금 왕국이 펼치고 있는 역삼각진이다.  측면에서 부딪혀오는 기마병에게 대처하면서, 공격받는 곳 반대편이 우회하여 포위하는 작전이다.  이론상으로는 제국에 대항할 수 있는 최상의 수비적인 진형이지만, 이 진형으로 승리를 거두기에는 단 한 가지 커다란 장애물이 있었다.

“우리 기마병의 돌격을 저지하지 못한다면, 쓸데없는 수다.”

벨가디쉬는 비웃었다.  이미 수백 번의 전투를 경험한 그의 전사 (戰史) 속에는, 이미 같은 진형을 수십 번이나 격파한 기록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번에도, 같은 방법으로 적의 진형을 돌파해 낼 자신이 있었다.  상대방이 펼쳐내는 지략을 순수한 힘으로 분쇄해 버리는 순간이, 전장에서 벨가디쉬가 가장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벨가디쉬가 보기에, 지금 적군이 펼치고 있는 진형은 지금껏 그가 깨부숴 왔던 수많은 진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눈에는 충분히 뚫어버릴 수 있는 전력이었고, 그의 귀에는 이미 수많은 적병의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겁쟁이 놈…’

벨가디쉬의 조소는 신을 떠올리며 더욱 깊어졌다.  원숭이 놈이, 운좋게 외척이 되어 출세를 하려는 모양이다.  나름대로 무명 (武名)을 쌓아온 모양이지만, 자신의 눈에는 아직 허명을 앞세운 애송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런 대형 회전 (回戰)을 앞두고 나니, 그 허명이 먼저 꽁무니를 뺀 모양이다.

‘검이 아까운 녀석이군.  전투가 끝나면 결투라도 신청해서 검을 빼앗아 버릴까……’

원숭이 녀석이슈트반 백이 차고 있던 검의 아름다운 곡선이 그의 머리속에 떠올랐다.  () 이슈트반 백은 동방의 원정에서 여러 개의 신기한 보물을 가지고 왔다고 들었다.  그 검 역시 그 보물 중의 하나일 것이다.  원숭이 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보물이다.

전투 개시를 준비하라는 북소리가 벨가디쉬를 상념에서 이끌어냈다.  벨가디쉬는 뒤를 돌아 자신 휘하의 기마대그 이름도 대륙 전체에 높은 크라슈토룸 (붉은 질풍) 기마대를 돌아보았다.  자신과 함께 수많은 전장을 헤쳐온 강병들이다.  벨가디쉬는 오른손을 들어 돌격준비를 지시했다.  크라슈토룸 기병대 1만은 말의 고삐를 조이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드라그노트 군 후위 가운데, 총 지휘관 알베르트 대공은 저 편에서 진형을 짜고 있는 적군의 진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오른편에서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대기하고 있는 신이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 가운데 날카롭게 전방을 쏘아보던 알베르트 대공은, 마침내 오른손을 들어 전군에 호령했다.

디즈 (돌격하라)!”

대공의 명령을 전달하는 뿔피리 소리가 볼마스타인 평원에 울려퍼졌다.  그와 함께 함성을 지르며, 드라그노트 군 전군 5만이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와 함게, 아르마인 왕국 측에서도 역시 울려퍼지는 뿔피리 소리와 함께 움직임을 개시했다.  귀가 멀 것 같은 함성소리와 함께 수많은 군마의 발소리가 평원을 진동시켰다.

대단한 대의가 있어 상대편을 죽이려는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이야기를 통해 학습되어 온 적대심, 죽음에 대한 공포감, 그리고 자신의 집을 떠나, 어쩌면 돌아갈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살육본능에 불을 지폈다.  이성을 잃은 채, 양국의 군대 9만은 서로를 향해 검과 창을 겨누며 돌진했다.  그리고 양 쪽의 군대가 처음으로 충돌했을 때, 수많은 생명이 결국 돌아갈 수 없는 길로 떠나고야 말았다.

양 군의 후열에서 쏘아대는 화살을 가지고 있던 방패와 갑주로, 때로는 옆에서 쓰러지는 동료의 몸으로 막아내며, 양 군의 보병대가 먼저 맞붙었다.  창과 갑옷이 부딪히고, 방패가 튕겨나가며 선혈과 함께 바닥에 나뒹군다.  창에 목이 꿰뚫린 병사가 멍한 눈으로 양 손을 휘저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을 외친다.  그의 허리를 베며 땅바닥에 메다꽂은 적병은, 또 다른 병사의 방패에 안면이 함몰되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성을 잃은 포효와 함께 적들을 창으로 난도질하던 병사는, 어느 편이 쏘았는지도 모르는 화살에 눈을 맞아 허공에 창을 휘두르며 쓰러졌다.  평원의 푸른 들판은 어느 새 양 군의 피로 그 색깔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양 보병대의 격돌에서 밀리기 시작한 것은 아르마인 군이었다.  기병대를 앞세운 전술의 강력함으로 악명을 떨치는 드라그노트 군이었지만, 애당초 그 전술 자체는 보병대의 튼튼함이 받쳐주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경장보병과 중장보병을 혼합해 편제한 드라그노트 군의 보병대는 기병대가 최적의 기회를 노려 측면을 공격할 수 있도록 적군을 압박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아르마인 군은 어느 새, 원래 포진하고 있던 곳까지 밀려가고 있었다.

보조를 맞추어 천천히 전진하고 있던 벨가디쉬의 눈에, 마침내 기회의 순간이 포착되었다.

“지금이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휘하의 장병들에게 신호했다.

보병대의 진격에 맞추어 전진하고 있던 크라슈토룸 부대는, 단숨에 가속했다.  단숨에 벨가디쉬 대 ()는 전장의 바깥으로 돌아 들어가, 가속에 충분한 거리를 확보했다.  그에 맞추어, 반대편의 좌익에 위치하고 있던  바즈노크 대 역시 거리를 확보하며, 진격을 준비했다.  오랜 시간 동안 벨가디쉬와 함께 전장을 전전해 온 바즈노크 장군은, 이제는 벨가디쉬가 별다른 지시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크라슈토룸, 전군 돌격!”

함성과 함께 벨가디쉬 부대는 돌진을 시작했다. 그 빠르기는 그야말로붉은 질풍이라는 이름에 어울렸다.  잘 훈련된 말과 기수들의 호흡에 맞춰, 크라슈토룸 부대는 한 자루의 잘 벼려진 창이 되어 아르마인 군의 좌익을 파고들었다.

여기까지는 수많은 패배의 경험을 통해, 아르마인 군에서도 예상하고 있던 전개였다.  중장보병의 배치를 측면에 집중하여, 전방의 보병 대 보병의 전투에서는 밀리더라도 측면의 일격을 막아내는 데 주안을 둔 포진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적을 막아내기 위한 포진으로, 병력을 측면에 더 배치한 만큼 측면에서의 방어력은 향상되었으나, 지금과 같이 전방이 밀리기 시작하는 것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벨가디쉬에게는 이미 많이 보아 온 상황이었다.

“궁지에 몰린 쥐새끼들아! 길을 열어라!”

벨가다쉬는 자신의 애도를 종횡무진 휘두르며, 자신의 앞에 있는 중장보병들의 머리를 찍어내렸다.  도검 수집가로 이름이 높은 만큼, 벨가디쉬가 사용하는 검은 드라그노트 군의 정식 제식 병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쓰고 있는 대도 (大刀)는 이전, 동쪽의 지방에서 이름이 높았던 무술가가 쓰고 있던 언월도라는 무기의 날 부분이었다.  동방의 신수, 용이 또아리를 튼 사이로 빠져나온 곡선 칼날을 창대에 단 무기로, 몸 전체를 사용하여 원심력으로 베어내는 무거운 무기다.  벨가디쉬가 그 무술가를 베고 이겨 그 언월도를 손에 넣은 후, 창대 부분을 잘라내어 본인의 한손 도로 사용하게 되었다.  강한 용력을 지닌 벨가디쉬에게, 그 정도의 무게는 충분히 한 손의 손목으로 제어할 수 있는 범위였던 것이다.

준비하고 있던 아르마인 군의 측면 부대는 가까스로 크라슈토룸의 강력한 돌진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일격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비단 드라그노트 군만이 아니라 아르마인 군 역시 뼈져리게 알고 있었다.  크라슈토룸 부대의 진정한 위력은 첫 일격이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지는, 첫번째에 버금가는 위력의 공격을 연속으로 퍼부을 수 있다는 데 있었다.

방추형의 진을 친 크라슈토룸은, 마치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치듯 전장을 돌아, 2격을 가했다.  첫 일격때보다도 더 많은 수의 피보라를 뿌리며 아르마인 군의 좌익은 크게 요동쳤지만, 이번에도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좌익이 무너지는 것이 시간 문제라는 것을, 벨가디쉬는 잘 알고 있었다.  적들의 전술은 뻔하다.  어떻게든 크라슈토룸 부대의 일격을 버텨내는 사이에, 우익의 부대가 반전하여 크라슈토룸 부대를 포위 섬멸하는 것이다.  하지만 좌익에도 바즈노크 대가 있다.  크라슈토룸만은 아니더라도, 명성 높은 드라그노트 제국의 기병대이다.  좌익 역시 바즈노크 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급급한 사이에, 벨가디쉬 대는 좌익을 돌파하여 본진을 급습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바즈노크 대 역시 순조롭게 적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아르마인 군의 우익은 허무할 정도로 후퇴를 거듭했다.  바즈노크 장군을 앞세운 부대는 순조롭게 피바람을 날리며 아르마인 군을 압박해갔다.  아르마인 군은 계속 밀리며 바즈노크 대를 끌어들였다.  바즈노크 대는 언덕을 등에 지고, 신나게 적을 도륙하고 있었다.

‘너무나 순조롭다.’

작은 의구심이 벨가디쉬의 마음에 피어났다.  무엇보다, 그들은 아직 아르마인 군의 기마병과 맞붙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설마… 바즈노크!”

벨가디쉬가 외쳤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바즈노크 대가 등지고 있던 절벽 위에서, 수천의 그림자가 일제히 일어나, 바즈노크 대의 등 뒤로 화살을 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전투 전에 있었던 작은 전투들에서 도망친 아르마인 군 병력은 사실은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이 평원에서 합류하여, 이 절벽 위에서 적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훤히 노출된 바즈노크 대의 등 뒤를 노리고 수많은 화살이 쏟아졌다.  바즈노크 대의 기마병들은 하나하나, 말 위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길게 뻗어있던 아르마인 군 전선 일부가 선회하여 바즈노크 대와 본대와의 연계를 끊었다.  너무나 깊게 파고들어갔던 바즈노크 대는 그대로 아르마인 군 한 가운데 고립되고 말았다.  아르마인 군 쪽에서 일어나던 피보라의 군영이 드라그노트 군 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죽음의 비명은 언어를 바꿔가며 평원의 대기를 저주로 채워나갔다.

‘이대로라면…!;’

벨가디쉬는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아르마인 군은 처음부터 기마병을 노렸던 것이다.  좌우로 길게 뻗은 진형은 이것을 위한 것이었다.  진형의 일부가 변화하여, 크라슈토룸과 바즈노크 대를 각각 포위하여 각개격파하는 것, 그것이 아르마인 군의 노림수였던 것이다.  실제로 바즈노크 대는 궤멸의 위기에 놓여 있으며, 아르마인 군이 곧 진형을 변경하여 크라슈토룸을 포위할 것이라는 것은 벨가디쉬의 눈에도 자명했다.  식은땀이 갑주 안에서 그의 등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 한번 아르마인 군의 진형이 변화했다.  마치 뱀이 꿈틀거리며 새끼를 낳듯, 진형은 교묘하여 변화하여 크라슈토룸 대를 압박해 왔다.  이와 같은 교묘한 전술을 입안, 지휘하고 있는 아르마인 군 신예의 장군은 입술 한쪽을 말아올리며, 옆의 숙장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이 바로, 드라그노트 군의 전설이 끝나는 날입니다.”

길다스 장군은 가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 가증스러운 벨가디쉬 놈의 목도 오늘, 우리 군의 손에 떨어지리라.”

길다스와 벨가디쉬는 이전부터 여러 번의 전투에서 대결해 왔으며, 길다스에게는 그 승부의 대부분이 불명예스러운 패배로 끝이 나 왔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승리하는 자가 진정한 승자인 것, 그 마지막 순간이 길다스에게 찾아온 것이다.  길다스는 자신의 단창을 매만지며, 언제라도 달려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길다스 장군, 녀석의 목은 곧 저절로 굴러올 것입니다.”

가름의 조소가 깊어졌다.  실제로, 제국이 자랑하는 기병대는 아르마인 군의 교묘한 전술에 힘을 쓰지 못한 채, 조금씩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직 그 기세는 지지 않았지만, 아르마인 군의 포위는 틈이 없었고, 그 안에서 천천히 드라그노트 군은 힘이 빠져가고 있었다.  전세가 불리함을 느낀 제국의 중장보병대도 전진을 멈춘 채, 한 두 발씩 후퇴하기 시작했다.  어느새인가 전세는 역전되어 가고 있던 것이다.

그 때, 또 다른 함성이 전장을 울렸다.  그것은 바즈노크 대에게 화살을 퍼붓고 있던 언덕 위에서 울려퍼진 함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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