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마스타인 평원 회전 (5)

5

언덕 위의 아르마인 군은 원초적인 환희에 젖어 있었다.

그들이 쳐 놓은 덫에 드라그노트 군은 너무나 쉽게 빠져들었던 것이다.  가파른 절벽에 가까운 언덕이기 때문에, 적은 이 언덕 위로 쉽게 올라오지 못한다.  올라오는 길은 쭉 돌아서 오는 능선, 이 위치를 공격해오고 싶어도, 이미 포위된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지금까지 그들에게 여러 번의 패배를 안겨주었던 공포의 드라그노트 제국 기마병단도 지금은 무방비 상태.  이미 이성이 날아간 자리에는 원시적인 야만성이 자리잡았다.  일방적인 살육에 몰두해 있던 아르마인 군은, 그들의 등 뒤로 다가오는 그림자를 눈치채지 못했다.

“공격하라!”

카이유르의 고함과 함께, 그가 이끄는 경장보병대가 아르마인 군에게 달려들었다.  그 역시 창을 꼬나쥐고 선두에서 아르마인 군의 배후를 급습한다.  힘과 기술이 균형을 이룬 창의 그림자는 종횡무진 어지럽게 움직이며 적군 병사 여러 명을 순식간에 쓰러트렸다.  그 뒤를 이슈트반 백작령의 병사들이 따라, 방금 전까지 일방적인 우위에 서 있던 아르마인 군을 지옥 아래로 밀어 떨어트렸다.

아르마인 군은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  몇몇은 후퇴하는 동료들에 밀려 절벽 아래로 떨어져 상처를 입었다.  대열을 제대로 정비하지 못한 채, 아르마인 군은 활을 버리고 칼을 빼어 들었지만, 드라그노트 군은 이미 잡은 승기를 내어줄 생각은 없었다.  카이유르 대는 아르마인 군을 절벽 끝으로 밀어내며 고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신은 아까 지도에서 보았던, 아르마인 군 진지 근처의 절벽에 대한 수상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카이유르를 불러, 카이유르 대를 이끌고 절벽 위의 고지를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만약 신의 걱정이 기우로 그쳐, 만약 그 위에 적이 없다고 한다면 그건 그저 신이 다른 이들에게 조롱을 받는 것으로 끝나면 된다.  하지만 만약 그 고지에 아무도 없었다 하더라도, 그 고지를 점령한 이상 위치의 이득이 있다. 만약 드라그노트 군이 원래 계획대로 아르마인 군을 밀어낸다면 방금 아르마인 군이 했던 것처럼 고지에서 화살을 쏘아 아르마인 군을 압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예측에서 신은 카이유르 대를 그 위치로 급파한 것이다.

그리고 신의 예상은, 그 자신조차 놀라울 정도로 맞아떨어졌다.  등 뒤의 공격이 멈춘 바즈노크 대는 가까스로 진형을 수습해, 자신들을 둘러싼 포위망에 맞서기 시작했다.  아르마인 군은 계획이 틀어진 것에 놀랐지만, 포위망을 조이며 얼마 남지 않은 바즈노크 대에게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줄기의 날카로운 질풍이 아르마인 군의 중앙을 몰아쳤다.  검은 그림자가 이끄는 기마대가 어느새 아르마인 군의 앞으로 성큼 달려와, 아르마인 군의 것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피보라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검은 그림자의 정체는 이슈트반 백 (伯), 신 이슈트반이다.  그가 이끄는 기마병단은 알베르트 황태자의 허락을 받아, 순식간에 전선으로 이동, 양 기마대를 포위하느라 생긴 작은 틈을 순식간에 파고들은 것이다.  이슈트반 대의 병력은 기마병 2천.  보병대 3천은 절벽을 확보하기 위해 파병했기 때문에 전체 병력으로 봐서는 그렇게 큰 비율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슈트반 대의 위력은 적은 병력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방향에서의 공격에 당황한 아르마인 군은 순식간에 무너져내려갔다.

신의 무용을, 적병들은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었다.  양 손으로 거머쥔 창을 휘둘러 적의 공격을 쳐내고, 그대로 반격하여 적의 숨통을 끊었다.  양 다리로 말의 방향을 조정하며 자유자재로 전방향을 공격하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인마일체 (人馬一體) 라 함에 부족함이 없었다.  신 휘하의 기마병 역시 강병으로서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피보라를 주위에 피워내며 전진하는 신의 뒤를 따라, 여러 개의 작은 피꽃을 피워나가며 대장을 따라 진격해 나가는 모습은, 크라슈토룸의 공포에 버금가는 새로운 두려움을 적들에게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괜찮으신가, 바즈노크 장군!”

마침내 바즈노크 대의 포위망을 뚫어낸 신은 대장을 찾았다.  전열을 가까스로 정비한 기마병 사이에서, 바즈노크가 오른손을 들어 건재함을 표시했다.  분전한 바즈노크의 갑주는 여러 곳이 깨져 있었고, 깨진 갑주 사이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바즈노크는 복부에 상처를 입고 있었지만, 그렇게 무거운 상처는 아닌 듯했다.  바즈노크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신은 그대로 말머리를 돌려, 아르마인 군의 중앙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슈트반 대가 새롭게 측면에서 중앙돌파를 시작하면서, 이슈트반 대의 깃발을 본 드라그노트 군 사이에서 환호의 함성이 일기 시작했다.  다시금 사기는 드라그노트 군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슈트반 대가 바즈노크의 포위망을 풀고 중앙으로 헤쳐나감에 따라 벨가디쉬를 포위하고 있던 포위망 역시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그 틈새를 놓치지 않은 벨가디쉬는 자신의 대도를 휘두르며 포위망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잠시 전열이 흐트러졌던 크라슈토룸 역시, 금세 대장을 따라 전열을 가다듬었다.  벨가디쉬를 포위한 채 잠시 승리의 단꿈에 취해있던 아르마인 군은, 곧 처절한 현실을 깨닫고, 현실을 깨달은 지 몇 초 지나지 않아 현실에 남아있을 권리를 박탈당했다.  크라슈토룸 역시 곧 포위망을 돌파하기에는 얼마 남지 않았다.

아르마인 군의 본진에서는 가름 장군이 뛰쳐나왔다.  본인의 작전은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  만약 저 새롭게 참전한 검은 그림자의 장수 – 가름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 의 기세를 막고, 그대로 선회하여 포위망을 뚫고 중앙에 침투하려는 벨가디쉬를 다시금 포위한다면 아직 승산은 있었다.  가름은 자신의 기마병을 이끌고 나아가 신과 맞닥뜨렸다.

“드라그노트의 신예인가, 제법 실력이 있는 모양이군.”

갑주와 투구에 몸을 감싼 신을 보고, 가름은 조소를 날렸다.  드라그노트 제국과 아르마인 왕국은 국경을 인접한 만큼, 언어가 그렇게 다르지는 않아 의사소통을 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언어를 자국어의 사투리라고 매도하고는 있었지만.  

“시벤 플뤼겔의 가름 장군인가.  명성은 익히 들었소.”

“호오, 나를 안단 말인가? 그렇다면 내 창술의 명성도 알고 있겠군.”

가름의 입꼬리 한 쪽이 올라갔다.  적국의 장수에게 인정을 받아 우쭐해진 것이 아니다.  본인의 명성을 알고 있다면, 그것이 앞으로 있을 단기접전 (單騎接戰)에서 어떤 심리적인 효과를 걸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시벤 플뤼겔 안에서, 가름은 창술의 명수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겨룰 수 있어 영광이오.”

가름은 신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돌격하여 창을 내찔렀다.  상황이 상황인만큼 신도 굳이 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두 기의 말이 격돌하며, 창날이 맞부딪혔다.  주변에 작은 불꽃들을 피워올리며, 두 명의 무장은 쉴새없이 예리한 참격을 교환해 나갔다.  주변의 병사들은 전투에 몰두하다가 둘의 화려한 무용에 눈을 빼앗겨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찌르고 막고, 베어내고 피하고 하는 와중 둘의 갑주에는 하나 둘씩 상처가 늘어갔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신은 가름의 찌르기를 고개를 숙여 피하고, 그대로 자세를 돌려 아래에서 위로 창을 올려쳤다.  기세를 막지 못한 가름의 손에서 창이 빠져나가 공중으로 날았다.

“앗!”

병사들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가름의 손에는 어느 새인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이 들려 있었다.  가름은 의도적으로 창을 손에서 놓친 것이다.  실은 그는 창술보다도 검술에 더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창술의 명수라는 소문을 퍼트린 것도 이와 같은 상황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가름은 그대로 빈틈이 드러난 신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네 녀석에게 쓰기는 아까운 기술이었지만…!’

신은 가까스로 창을 되돌려 참격을 막았다.  가름의 필살의 일격은 신이 들고 있던 창을 반으로 갈라냈다.  위력이 죽은 일격은 신의 투구에 부딪혀 불꽃을 튀겨냈다.  만약 신이 창으로 일격의 위력을 죽이지 않았다면 그는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말을 가름에게 부딪혔다.  기세가 죽지 않은 말은 가름과 그가 탄 말을 두 발자국 후퇴시켰고, 가름이 자세를 잡았을 때 신은 이미 허리에 찬 본인의 애도를 뽑고 있었다.  

“좋은 검이구나!”

가름은 다시금 말을 부딪혀왔다.  창과 창의 싸움에서 검과 검의 싸움으로 바뀌며, 다시금 두 명의 무장은 어지러운 검격을 부딪혀갔다.  가름의 일격을, 신의 애도가 푸른 검광을 뿌리며 분쇄한다.  신의 종베기를 가름은 피해내며, 예리한 찌르기를 신에게 퍼붓는다.  검과 검이 부딪히며 생겨가는 불꽃을 서로의 갑주에 튀겨가며, 둘은 생사를 건 싸움에 몰입해갔다.

둘의 승부는 호각, 하지만 한 순간, 신의 머리 부분에 빈틈이 생겨났다.   그 순간, 가름은 비장의 상단베기를 신의 머리에 내리쳤다.  하지만 그 틈은 신이 일부러 보인 것이었다.  가름의 장기인 심리전에서, 이번에는 신이 승리한 것이다.

신은 가름의 검날을 막아내며, 말을 이끌어 가름의 옆으로 돌아갔다.  신과 가름의 거리가 잠깐 가까워졌을 때, 신은 맞붙은 검을 비틀어 내리며 반대손으로 가름의 팔을 붙잡아 둘렸다.  가름의 몸이 뒤틀리고, 검은 그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신은 훤히 드러난 가름의 목을 향해 애도를 치켜들었다.

“!”

순간, 격통이 신의 어깨를 달렸다.  길다스 장군이 달려오며 자신이 들고 있던 단창을 내던져, 신의 오른 어깨를 적중시킨 것이다.  신의 어깨 갑주가 깨져나가며, 신은 하마터면 자신이 들고 있던 애도를 놓칠 뻔했다.

“젊은이를 이런 곳에서 잃을 수는 없다.  애송이여, 대신 내가 상대해주마, 같은 시벤 플뤼겔이니 모자람은 없겠지.”

신은 붙잡았던 가름을 길다스 쪽으로 밀쳐내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정말 다행히도 타박상 이외에는 상처는 없는 듯했다.  길다스는 말에서 새로운 단창을 꺼내며, 양 손에 든 단창을 내찌르며 신을 압박해왔다.  신은 자신의 어깨를 타고 전해지는 고통이 사라질 때까지 방어에 전념했다.  신의 이마에서 한 줄기 땀이 흘렀다.  역시 아르마인을 대표하는 일곱 개의 날개 중 하나, 그 실력은 가름에 비해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신이 마침내 반격에 나서고, 두 사람이 열 합 정도 겨뤘을 때, 다시금 전장에 변화가 일어났다.  마침내 벨가디쉬가 포위망을 돌파하고, 중앙에 난입한 것이다.  벨가디쉬는 순식간에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 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없는 곳에서 촌극을 공연하고 있구나!”

나타난 벨가디쉬는 길다스와 신이 싸우고 있는 곳으로 돌진했다.  기세를 몰아 벨가디쉬는 신과 대치하느라 빈틈이 드러난 길다스의 어깨에 대도를 내리쳤다.

길다스의 어깨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아나왔다.  곧바로 가름이 병사에게서 뺏을 칼로 벨가디쉬를 압박해, 곧 벨가디쉬는 뒤로 물러섰지만, 이미 길다스는 말에서 낙마하기 직전이었다.  가름은 길다스를 안아 올려 자신의 말로 옮겨, 말머리를 뒤로 돌려 달렸다.

“후퇴한다!”

가름은 마침내 자신이 패배했음을 깨달았다.  벨가디쉬가 포위망을 돌파한 이상, 자신의 작전은 실패했다.  이렇게 된 이상 패배는 피할 수 없다.  차라리 지금과 같이 혼전이 되었을 때 후퇴하는 것이 손실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신과 벨가디쉬는 가름을 쫓으려 했지만, 후퇴하는 아르마인 군과 그에 휘말려 전선이 흐트러진 드라그노트 군이 그 사이를 채워, 멀어지는 가름을 바라볼 수밖에는 없었다.

“추격한다!”

그 와중에도 적병의 머리를 대도로 짓이기며 벨가디쉬가 명령했다.  마침내 싸움의 향방이 정해졌던 것이다.

드라그노트 군은 후퇴하는 아르마인 군을 쫓으며 살육을 마음껏 누렸다.  하지만 평원을 벗어난 아르마인 군이 숲으로 들어가 후퇴하면서, 움직임이 제한된 기마병단은 끝까지 아르마인 군을 쫓을 수는 없었다.  가름 역시 길다스를 말에 태운 채, 가까스로 전장을 빠져나갔다.

볼마스타인 평원 회전에서의 드라그노트 군 사상자 수 8천여 명, 아르마인 군 사상자 수는 2만 6천명에 달했다.  병력의 대부분을 잃은 아르마인 군은 알텐하겐 성으로 돌아가 재정비하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알텐하겐 내에서 저항군을 조직한 자가 어느새인가 성의 점령군을 내쫓고, 성을 차지한 채로 문을 걸어 잠궜던 것이다.  평원의 패배와 함께 가지고 있던 보급품을 잃은 아르마인 군은 어쩔 수 없이 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는 없었다.

아르마인 군을 쫓아온 드라그노트 군을 향해 알텐하겐 성은 잠시의 고민 후에 문을 열었고, 드라그노트 군은 별 다른 저항 없이 입성할 수 있었다.

대륙력 983년, 제국력 387년 10월의 일이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