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마스타인 평원 회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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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개가와 함께 드라그노트 군은 알텐하겐 성에 입성했다. 비록 위험한 순간에 놓였던 적은 있었으나, 결국 드라그노트 군은 아르마인 군에 커다란 피해를 입히고, 손쉽게 성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한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몸을 빼는 데 성공한 병사들의 얼굴에는 안도감과 함께, 영광을 안고 집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드라그노트 군들의 머리 위에 떠오른 수많은 희망의 풍선 속에서 가장 크게, 그리고 가장 높이 떠오른 것은 오토프란츠 공의 것이었다. 그는 알텐하겐 왕 오스트발 5세의 막내아들로, 나이는 올해 스물 다섯에 이른다. 아르마인 왕국이 침략하고 알텐하겐 성이 함락되었을 때, 그는 지체없이 가족들과 국민을 버리고 드라그노트로 도주했다. 그는 어린 시절 제국의 황립학교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어, 그 인맥을 살려 제국 황가에 알텐하겐의 구제를 호소했다. 그리고 지금 드라그노트 군이 승리하고 알텐하겐에 입성했을 때, 그의 꿈은 나라가 멀쩡했더라면 결코 꾸지 못했을 자리 – 왕의 옥좌 – 로 향하고 있었다.
자신을 붙잡는 손들을 뿌리친 채 혼자 도망쳤다는 사실은, 이미 오토프란츠의 머리 속에서 낭만의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는 구국의 결단을 내린 것이다. 아르마인의 침략자들로부터 국민을 구할 유일한 길은 자신의 인맥을 살려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으로, 자신은 그것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알텐하겐에 구원자로 돌아왔다. 구국의 용사에게 어울리는 자리는, 이제는 자리가 비어버린 옥좌 이외에는 없어 보였다. 본래라면 막내아들인 자신에게는 너무나 먼 자리였지만, 드라그노트라는 커다란 뒷배가 생긴 지금은, 살아남은 얼마 없는 친족들 누구보다도 그가 왕좌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드라그노트의 입장에서는 굳이 오토프란츠의 야심에 제동을 걸 마음은 없었다. 아르마인이 알텐하겐을 침략하여 병합한 것이 드라그노트가 군대를 파견한 이유인터라, 다시금 알텐하겐을 드라그노트에 병합함으로써 타국에 명분을 줄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오토프란츠를 신왕으로 세우고, 대신 금광에 대한 권리 일부를 손에 넣는 것이 드라그노트의 노림수였다.
‘이왕 싸우고 이겼으니, 조금 더 변죽을 울려주는 것도 괜찮으리라.’
말하는 데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 드라그노트 군은 소리높여 오토프란츠의 위대함을 칭송했다. 침략자에 맞서 싸운 알텐하겐의 국민들을 칭송하며, 그들의 새로운 지도자가 될 오토프란츠의 결단력, 그리고 지도력을 격찬했다. 그 이야기 중의 대부분은 과장되었고 또 나머지는 조작된 것이었지만, 오토프란츠의 마음 속에서는 이미 진실로 굳어져 있었다.
알텐하겐의 구원자라는 위대한 모습은 그 자신의 머리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문제였지만.
알텐하겐 국민들은 생각이 달랐다. 아무리 아르마인 군의 대부분이 드라그노트와의 싸움에 동원되었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남은 병력과 싸워 자유를 쟁취한 것은 그들 자신이다. 단 오백 명의 군대를 순식간에 조직하여 몇 배가 되는 점령군을 내쫓고 성을 되찾았다. 승리를 거두고 아르마인 군을 쫓아 성으로 접근하는 드라그노트 군을 도중에 요격한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저항군의 지도자는 척화파를 필사적으로 설득하여 성문을 열었다. 더 이상 알텐하겐의 국민들에게 피를 흘리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척화파의 몇몇은 오토프란츠를 적대적인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뒤에 있는 드라그노트 군 때문에 감히 나서지를 못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오토프란츠는 입성하자마자 대관식 준비를 시작했다. 드라그노트 군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그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대관식을 최대한 화려하게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양심은 있었는지 준비는 검소한 모습으로 준비되었다. 대관식이 준비되는 동안 드라그노트 군은 조약 날인 준비를 시작했다. 이미 출병 전에 약조가 되어 있었던, 명분상으로는 어떻듯 알텐하겐을 사실상의 속국으로 만드는 조약서다. 왕좌에 앉을 꿈 속에 익사하기 직전이었던 오토프란츠에게는 조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알텐하겐 국민들에게 공포심을 주지 않기 위한 알베르트의 배려로, 입성한 소수의 호위 병력을 제외한 드라그노트 군은 성 밖에 진을 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대신 성문을 개방하고 병사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 대관식이 이루어질 때까지의 일주일 동안, 병사들은 진채 안에서 편하게 쉴 수 있었다.
다른 장군들이 성 안에서 조약식 등 여러가지를 준비하는 동안, 신은 바깥의 진채에서 지내고 있었다. 누군가는 흐트러지기 쉬운 군율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전장에서는 흉포한 야만성을 내뿜던 드라그노트의 강병들도, 신의 지휘 하에서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승전 후의 약탈이 일상적이던 시대에서는 그렇게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일단 드라그노트 군은 해방군을 연기해야 하는 것이다. 조약식과 대관식이 끝나고 귀환하는 때까지 이 열연을 지속시키는 것이, 신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조약식도 대관식도 신에게는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대관식 후의 연회에서도 신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머물러 있었다. 동방의 신비한 용모를 가진 미남인 그에게 여러 귀부인들이 미소를 띄며 다가왔지만, 신은 적당한 핑계를 대고 거절한 후 발코니에 나와 바람을 쐬며 밤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흥이 나는 분위기를 타지 못하고 겉도는 성격의 소유자는 결코 아니었지만, 이국의 땅에서 벌어지는 연회는 그에게는 전혀 즐겁지 않았다. 억지로 즐거운 척을 하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단점 중 하나라는 사실을 신은 잘 알고 있었다.
‘돌아가고 싶군…’
순간 신의 얼굴에 헛웃음이 지나갔다. ‘이국의 땅’에 와 있다는 생각을 한 자신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미 자신은 오래 전에 이국에 와 있던 것이 아닌가.
‘결국, 그 곳이 집이 된 걸까?’
자신이 처음 이 대륙에 와서 지내기 시작한 곳, 이슈트반 령. 여동생이 있고, 동료들이 있고, 자신이 지켜야 할 영민들이 있다. 어느 덧 그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자신이 있다는 것에 신은 당혹감과, 이슈트반 령의 봄 풍경을 그리는 것 만으로도 느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실례합니다. 이슈트반 백이신가요.”
등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은 뒤를 돌아보았다. 한 명의 젊은이가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창백한 피부에 선량한 인상을 가진 청년은 신보다도 더 나이가 어려 보였다. 이제 막 스무 살 즈음 되었을까, 얼굴에 미소를 띄며 신을 바라본다. 얼핏 보기에는 가냘픈 몸을 하고 있는 유약한 서생처럼 보였으나, 적의가 없는 눈빛 속에는 예기(銳氣)가 자리잡고 있었다.
신은 왠지 모르게 이 청년이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었다.
“그렇습니다. 귀공은?”
“아, 죄송합니다. 저는 지난이라고 하는 자입니다. 이번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신 이슈트반 공에게 인사를 드리고자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을 여쭈었습니다.”
“지난 공이시라면, 바로 그?”
연회장 안쪽에서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억지로 인사를 하며 돌아다니다 귀에 들어온 이름이었다. 알텐하겐 성 내에서 오백여 명의 저항군을 조직하여, 몇 배나 되는 점령군을 성 밖으로 쫒아낸 인물이었다. 저항군의 지도자로 활동했던 인물은 따로 있었지만, 실제로 짧은 시간 내에 저항군을 조직, 훌륭하게 운용하여 알텐하겐 성을 되찾았다고 하는 인물의 이름이 지난이라는 것을 알고, 신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터였다. 신은 바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훌륭하신 계략으로 성을 되찾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떤 분이신지 궁금하던 차였습니다. 설마 이렇게 젊으신 분이실 줄이야…”
신 역시 젊은이의 범주에 들어가고도 남았지만, 이 인물은 자신보다도 나이가 젊다. 이제 갓 소년 티를 벗은 이 청년의 머리에서 어떻게 그런 기재(奇才)가 나온 것일까.
“아닙니다. 볼마스타인 평원에서 아르마인 군의 전술을 격파하신 이슈트반 공의 전술안이야말로 제가 배우고 싶던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아르마인 군은 절벽을 타고 각개격파를 노렸겠지요.”
“호오, 그런 것까지 알고 계셨단 말인가요.”
신은 놀랐다. 볼마스타인 평원의 회전이 어떠한 식으로 흘러갔는지는 아직까지 제대로 알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볼마스타인 평원에서 양 군이 전투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르마인 군에서 그런 전술로 나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드라그노트 제국의 기병대를 상대하기에는 그런 전술이 유효하지 않았을까 하고…”
지난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볼마스타인 평원 회전의 모습을, 마치 눈 앞에서라도 본 듯이 신에게 설명했다. 실제로 그 전투를 경험했던 신은 전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생생하게 설명하는 지난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공은, 저희가 싸우고 있던 때를 노려 성을 탈환하신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드라그노트 군을 각개격파하기 위해 필요한 진형을 짜기에는 많은 인원이 필수. 아르마인 군이 대부분의 병력을 데리고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허, 그런…”
지난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단순히 성을 탈환하는 전술적인 시야만이 아닌, 전국을 읽는 시야도 갖춘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인재가 알텐하겐 성에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훌륭하신 안목을 갖추신 분이로군요. 귀공의 지략이라면 알텐하겐에서도 중용되실 터인데…”
오토프리츠가 대관을 하면서, 본인이 중용할 사람을 중에 저항군 소속이 별로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신은 눈 앞의 남자가 그 재기에도 불구하고 기용되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지난은 표표히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그저, 제 주변의 사람들을 지킬 수 있었던 것에 만족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저, 제 스승님께 배운 조그만 재주를 조금 응용해 보았을 뿐입니다.”
“매우 훌륭하신 분이겠군요. 그 스승님이시라는 분은. 혹시 스승님의 존함은 어떻게 되실까요.”
“아르카나 님이시라고 합니다.”
“아, 그 이름 높으신…”
신산귀모(神算鬼謀)의 소유자로 이름 높아 수십년 전부터 이름을 날리고, 그 지혜와 지식으로 마도사 (魔道使)라는 칭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주군 없이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는 현자 아르카나가 지난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신 역시 아르카나의 전설을 들으며 자라왔던 터라, 그의 제자가 눈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신과 지난은 발코니에 서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은 자신이 겪었던 전투에 대한 이야기와 자신이 자라났던 동방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지난은 본인이 살아오며 스승 아르카나에게 배웠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우들과 같이,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연회가 끝나고 나서도 둘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지난의 집으로 간 신은 술상을 펴 놓고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며 새로운 친우의 탄생을 축하했다. 국가의 차이, 혹은 정치적인 입장의 차이 따위는 둘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드라그노트 군은 바로 그 날 알텐하겐을 떠나기로 했으므로, 다음에 만날 날은 요원해 보였다. 신과 지난은 헤어짐에 아쉬워하며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지난 공, 조만간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요.”
“예. 반드시…”
신은 사실 지난에게 알텐하겐을 떠나 드라그노트로 오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밤새 이야기를 한 결과, 지난의 마음에는 자신이 태어나 자란 알텐하겐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포기했던 것이다. 지난 역시 같은 마음이라, 마지막 인사의 표정에 남은 아쉬움을 지우지는 못했다. 밤새 지음 (知音)이 된 두 명의 영걸들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뜨거운 악수를 나눈 채, 각자의 길로 헤어져 갔다.
그들은 결국 함께 말머리를 한 채 대륙을 종횡하는 사이가 되지만, 그 때가 되기까지는 아직은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신왕 오토프리츠 5세를 옹립한 후, 드라그노트 군은 제도(帝都) 쥬논으로 향하는 귀로에 올랐다. 드라그노트 제국은 아르마인 군을 크게 격파하고, 알텐하겐의 막대한 금광에 대한 권리를 손에 넣게 되었다. 제국의 부유함은 그 깊이를 한층 더했고, 그 위상은 다시 한번 크게 높아졌다. 이제 제국을 정면에서 누를 수 있는 국가는 대륙 내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제국의 영화 가운데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어떤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는지를, 그리고 이번 전투가 한 명의 복수자를 낳았다는 것을, 개선 행렬 안의 그 아무도 예측할 수는 없었다.
제 1장 볼마스타인 평원 회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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