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을 쓰고 서로를 물어뜯는 아귀도_[Yellowface] by R. F. Kuang
멀어질 수록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겠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
1918년 영국 런던의 한 극장에서, 입으로 총알을 잡아내는 마술을 하던 중국인 마술사가 사고로 사망한다. 청링수라고 하는 이름의 그 마술사는 영어를 할 줄 몰랐으며, 모든 공식 석상에서 통역사를 통해 의사소통을 했다. 19년 동안 마술을 해 왔던 그가 사망하고 나서 놀라운 사실이 밝혀진다. 청링수라는 이름은 1898년 뉴욕에 공연을 왔던 청나라 마술사 칭링푸의 이름을 훔쳐 온 것이었으며, 갈색의 피부색은 그의 하얀 피부를 물들인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윌리엄 캠벨. 사망할 때까지의 19년 동안 그는 조악한 분장으로 주변을 감쪽같이 속였다. 탁월한 거짓말장이라고 감탄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의문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주변은 정말, 그의 거짓말에 감쪽같이 속았던 것일까.
"속았다"라고 스스로에게 또 다른 거짓말을 하면서, 마음 편한 희생자를 연기하면서 단물을 빨아먹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데뷔작이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잊혀진 작가 준 헤이워드에게는 '세대의 목소리'로 주목받고 있는 스타 작가, 아테나라는 친구가 있다. 빼어난 외모와 글솜씨를 갖춘 동양인 작가로서, 아테나는 내놓는 작품을 모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려놓고, 준은 그것을 바라보며 열등감에 괴로워한다.
어느 날, 아테나의 집에서 팬케익 많이 먹기 시합을 하던 중 (...) 아테나가 질식하는 사고가 일어난다. 준은 아테나를 살리려 했지만 실패하고, 결국 아테나는 사망하고 만다. SNS에서는 애도의 물결이 일고, 아테나의 유일한 친구인 준의 계정은 잠시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세상은 준을 다시 잊어가지만, 준의 손에는 아테나의 집에서 가지고 나온, 아테나의 유작 초고가 있었다...
문제는 그 초고가 미국에 온 중국인 노동자들의 역사를 다룬 작품이었다는 것이고, 초고가 너무 러프하다 보니 처음에는 손만 조금 보려고 했던 준의 노력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가 새로 쓰다시피한 작품이 되었고, 어쩌다 보니 준은 이걸 자기가 쓴 작품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작품이 좋다 보니 (그리고 "다양성"이 넘치는 작품이다 보니) 출판사는 그걸 믿었으며, 하지만 소재가 소재이다 보니 백인인 준의 정체성이 문제가 되었으며, 그러다보니 준은 살짝 스스로의 백인 정체성을 "다양성 있게" 있어 보이도록 조작했고, 누군가는 준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책은 철저히 준의 관점에서 진행된다. 그녀는 자신이 한 행동을 철저히 합리화시킨다. 준의 초고는 쓰레기였고, 자신은 그것을 다듬어 스스로의 작품으로 만든 사람이다. 편집이라는 이름 아래 초고가 가졌던 특징은 철저히 난도질당하지만 준은 그것을 무시한다. 백인이 쓴 중국 소재의 소설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어, 스스로가 지금까지 쓰던 이름 대신 "주니퍼 송"이라고 하는 "다양성 있는" 이름을 가지게 되지만 문제가 아닌 것처럼 스스로를 속인다.
스스로의 양심을 저버린 준에게 문을 열어준 출판계 역시 그 추악한 민낯을 드러낸다. 아무리 봐도 수상해 보이는 준을 애써 보지 못한 척을 하며, 작품을 출판하는 데에만 열을 올린다. 그 와중에 누가 봐도 백인인 준에게 애매모호한 정체성을 부여하며,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진실되지 않은 모습을 강요한다. SNS 역시 다를 것이 없다. 준의 작품이 성공했을 때에는 모두 입을 모아 칭송하지만, 그녀의 의혹이 불거졌을 때는 더 할 나위 없이 잔인하다. SJW들은 작품이 아니라 준의 피부색을 문제삼는다. 작품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 역시 정의구현보다는 사람들의 관심을 자신이 빼앗기 위한 것일 뿐이다.
이렇게 점점 에스컬레이트해 가는 소설을 읽어가면서 때로는 혀를 차고, 때로는 킥킥대기도 했었으나, 막상 엔딩에 다다랐을 때는 아쉬웠다. 정신적으로 몰려가는 준의 시점에서 나름 복선을 깔아놓았지만, 그 아수라장을 헤쳐낸 인물이 겨우 이런 소동으로 몰락하는 과정이라니. 다만 동양의 귀신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서양 독자들로는 조금 섬찟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서도.
결국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독자가 누구냐에 따라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감상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문화적 전유'라는 관념이 강한 미국에서는 이 작품을 제목에서와 같이 "옐로페이스"를 쓰게 된 작가의 블랙 코미디, 혹은 문화적 전유에 실패한 백인의 실패담으로 읽힐 수 있겠으나, 실질적으로 인종차별에서 조금 벗어난 문화권의 독자들에게는 출판계로 대표되는, 고상한 척 하지만 결국 속물에 불과할 뿐인 위선자들이 서로를 물어뜯는 피카레스크 소설로서의 매력이 더욱 어필하지 않을까 싶다.
캠벨의 조악한 분장을 주변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성공적인 마술사가 흘리고 다니는 단물은 굳이 진실을 쫓기에는 너무나 달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며, 남겨진 사람들은 자신들을 "감쪽같이" 속인 캠벨을 욕하고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기억이 흐려지면 또 다른 청링수를 찾아 빨대를 꽂을 뿐이다. 준을 쫓으며 그녀를 몰아세운 사람들은 그녀의 성공으로 인해 만들어진 적들이지만, 그런 적들에게 힘을 준 존재들은 결국 준 스스로의 욕심과 어리석음이다. 서로가 서로를 먹어치우는 아귀도 속에서 그녀 역시 훌륭한 한 마리의 아귀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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