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적인 분위기가 매력적인 미스터리 - [지옥의 기술사] by 니카이도 레이토
십자가 저택이라고 불리우는 실업가의 저택에 미이라의 모습을 한 남자가 출몰하기 시작했다. 얼굴에 붕대를 감은 모습을 한 그는 스스로를 "지옥의 기술사"라 자칭하며 이 실업가 가족을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예고한 것이다. "지옥의 기술사"의 목적은 무엇인가?
1992년에 발표된 니카이도 레이토의 데뷔작이자, 탐정 니카이도 란코의 첫 번째 사건. 니카이도 레이토의 이름은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작품보다는 [용의자 X의 헌신]이 본격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여 논쟁을 한 것이 유명할 것이다. 조금 더 일본 미스터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대표작 [인랑성의 공포]가 약 4천 페이지 분량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 미스터리라는 비공식적인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아야츠지 유키토와 같은 신본격 미스터리보다는 조금 더 고전적인, 에도가와 란포 혹은 요코미조 세이시 쪽에 더 가깝다. 니카이도 란코 시리즈의 배경 역시 쇼와 시대로, 이 [지옥의 기술사]는 1964년 (일 것이다)를 배경으로 한다. 태평양 전쟁에서 막 벗어난 일본을 배경으로, 이제는 너무나 클리셰적이라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지는 (...) 김전일 시리즈 초창기에나 나올 괴인들이 범인으로 등장하는데, 배경과 범인이 너무나 잘 어우러져 기괴하면서도 멋들어진 분위기를 자아낸다. 몇 몇 묘사는 교고쿠 나츠히코를 연상시킬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니카이도 레이토는 독자와의 페어한 추리 게임을 중시하는 성격으로, 소설 안에서 독자가 추리할 수 있는 모든 재료를 제공하는 것이 미스터리의 미덕이라고 주장한다. 독자는 탐정이 거치는 것과 동일한 과정을 통해 답을 도출해 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주어지는 정보는 탐정과 독자가 동일해야 "페어함"이 손상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그 페어함을 희생한 [용의자 X의 헌신]이 본격 미스터리로 상을 휩쓸었던 것이 맘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대신 트릭과 범인 부분은 조금 슴슴한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모든 단서를 풀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보니, 중반 즈음에서 범인을 어느 정도 때려 맞출 수 있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겠다. 범인의 동기를 밝히는 부분은 조금 사족이었다는 느낌도 들고. 하지만 이 작품은, 분위기로 이 모든 단점을 상쇄한다. 초반의 범인의 묘사는 너무나 전통적이라 오히려 매력적이고, 클라이맥스의 묘사는 그야말로 악마적인 에너지가 넘쳐난다. 왜 니카이도 레이토가 너무나 잘 보이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씬에 남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비밀을 감춘 자산가, 특이한 모습을 한 저택. 기괴한 분장을 한 살인마. 너무나 쉽게 죽어나가는 피해자들. 쾌도난마의 추리력으로 범인을 쫓는 미소녀 명탐정. 요사하고 기괴한 클라이맥스. 한 십 년 전만 하더라도 너무나 뻔한 클리셰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2024년에는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진다. 사건편-탐정편-해결편 중 탐정편에서 조금 템포가 느려지지만, 그 이외의 부분에서는 페이지가 술술 넘어갔다.
원래는 이 작품 이후에 바로 [인랑성의 공포]을 읽고 이 작가는 졸업하기로 했었는데, 다른 작품을 몇 개 더 읽어봐야겠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만족했던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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