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와는 전혀 다른 경험 - [루 가루 - 피해야만 하는 늑대 ルー=ガルー―忌避すべき狼] by 교고쿠 나츠히코
모든 것이 네트워크에 연결된 단말기를 통해 관리되는 세계. 그 안에서 아무런 불만 없이 살고 있던 소녀 마키노 하즈키의 주위에 연쇄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모니터로만 세상을 인식하고 있던 하즈키의 세계에 점차 현실의 위협이 다가오기 시작하고, 그 전까지는 자신과 어떠한 연관도 없던 동급생 소녀들과 함께, 사건에 얽혀들기 시작한다.
소녀들의 멘탈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던 카운슬러 후와 시즈에. 그녀가 담당하던 소녀가 연쇄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되면서 그녀 역시 사건에 휘말린다. 서둘러 사건을 종결하려고 하는 사건 관리관을 의심하게 된 시즈에는 자신과 같은 의심을 품은 노형사 쿠누기와 함께 사건을 조사하며, 이 사건이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제는 찾기도 힘들 2001년판을 예전에 구해놓고, 사 놓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가 이제야 찾아 읽었다. 생각해보면 미친 듯이 원서를 찾아 구하면서 읽어댔던 2000년대 초반에 비해서는 열정도, 작가에 대한 무한의 애정도 점차 사라져 가는 것 같다. 돈이 생기면서, 그리고 킨들 등의 매체를 통해 원서를 구하는 것이 쉬워지면서 오히려 책을 사 모으는 것에 대한 집착이 덜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원서를 구하기가 어려웠던 그 당시에는, 주문을 통해 구했던 책에 대해 애착이 생기면서 냉정한 평가나 작품에 대한 이해가 오히려 더 힘들어졌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보이더라도, 오히려 내가 언어가 짧아 잘못 읽은 게 아닌가, 제대로 읽지 못한 게 아닌가...라고 자책하며 작품에 대한 평가를 상향 조정했던 것이다. 그 당시 읽었던 책의 감상을 이글루스에 올렸었는데, 이번에 백업을 받아 읽어보면서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 느낌을 여러 번 받았다. 반성하는 의미로 이번 기회에 예전에 읽은 책을 재독하면서 다시 감상을 써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다시 책 얘기로 돌아가서...일단 저 책의 띠지에는 자그마하게 "근미래 소녀 무협소설"이라고 적혀있다. 교고쿠 나츠히코가 "근미래" "소녀" "무협" 소설을 썼다니. 백기도연대에서 나왔던 액션 신을 이미 읽었던 나로서는 왜 이걸 이제야 읽게 됐지...라고 탄식 반 기대 반으로 책을 열었지만, 사실 이 단계에서 나는 이 책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 오해는 다 저 띠지 때문이다.
이 소설은 국가가 데이터를 통해 국민들을 관리하고, 사람과 사람의 접촉이 최소화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 소설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근미래 설정을 잡지 혹은 인터넷을 통해 독자로부터 공모를 받았다는 것이다. 일방향 커뮤니케이션으로 이루어져 있는 작가-독자의 소통을 쌍방향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시도였는데, 비슷한 방법을 교고쿠와 같은 사무소 [大極宮] 에 소속된 오사와 아리마사도 [미래형 J]라는 작품을 통해 시도하기도 했다 (이 양반은 한 술 더 떠서, 마지막 챕터를 공모를 받아 최우수작을 그대로 책에 실어버리는 기행을 저질렀다. 따라서 평가도 그닥 좋지 않았다) 덕분에 많은 아이디어들이 이 책에 실리게 되었고, 아직 스마트폰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이 책이 쓰여진 2001년 기준으로는 꽤 신선한 아이디어들이 실렸으며, 개중에는 꽤 섬찟할 정도로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묘사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초반부는 세계관을 설명하는 데 할애한다. 정부가 어떻게 데이터를 통해 국민들을 관리하고, 관리 시스템 상에서 개인과 개인이 얼마나 멀어졌는지, 타인과의 관계에 얼마나 무감각해졌는지, 살인이라고 하는 끔찍한 개념이 얼마나 무의미하게 다가오는지에 대해, 작가 특유의 장광설, 그리고 등장인물들 간의 대화를 통해 설명한다. 교고쿠 나츠히코 특유의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문체를 오랜만에 접한 것은 반가웠지만, 대체 무협은 언제 나오는지가 더욱 궁금해졌고, 대체 이 책은 뭘 말하고 싶은 건가...라고 혼란스러워하며 책장을 넘겼다.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플롯은 좀 더 선명해진다. 살인사건에 대한 타임라인도 정리되고, 점차 악역도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따로 놀고 있던 캐릭터들이 서로 얽히게 되면서, 희미했던 캐릭터들의 매력도 좀 더 직접적으로 다가오면서 (만약 이것까지 작가가 생각했다고 한다면 정말 대단한 구성이라 생각된다. 스토리의 재미와는 별개로) 이야기에는 탄력이 붙기 시작한다. 후반부가 되며 범인, 그리고 주인공 일행의 대결은 조금 미진하게 끝나는 감이 있다. 약속했던 액션이 마침내 나오지만... "무협" 타이틀을 붙일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확실한 건, 처음에 나타내었던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찾기에서는 멀어진 지점에 이야기가 착지한다는 것이다.
이런 근미래-사이버펑크물이 그렇듯 엔딩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끌어가는 장치 중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것들이 몇 개 있어 꽤 흥미깊었다. 그 중에 하나는 백귀야행 시리즈와 느슨하게나마 이어진다는 것. 어딘가에서 봤던 이야기인것 같아서 찾아보니... [백귀야행-음]에 나온 인물이 등장했다. 이 부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 인물 때문에 본작을 시리즈의 한 편으로 놓을 수는 없을 것 같고, 가벼운 팬 서비스 정도로 볼 수 있을 듯.
교고쿠 나츠히코의 작품들이 신나게 미디어믹스되고 있던 시기에 출간된 소설이고, "미소녀" "근미래" 컨셉이 잘 먹힌다고 생각되었는지 코믹스화, 애니메이션화도 되었으며, 2권도 몇 년 후에 출간되었다. 조금 쉬어간 후에 천천히 2권을 읽어보아야겠다.
결론은 백귀야행 시리즈의 팬이라면 추천.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