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Tube와 나무위키의 시대에 [종의 기원]을 읽는 것에 대하여

 


그래도 티는 내야 한다

마침내 6월 29일자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끝내면서, 굿리즈 기준으로 ‘24년 상반기 60권 독서를 달성했다. 만화책과 기타 굿리즈에서 데이터를 찾을 수 없는 책들을 합하면 60권보다는 조금 더 많겠지만, 사실 숫자가 중요하다기 보다는 이제서야 내가 1년에 얼마나 읽는지 가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
게다가 상반기 마지막 완독이 이 책이라니, 올해 초에 용감하게 사고 나서 몇 달을 꾸역꾸역 읽었던가. 번역으로도 이해가 힘든 내용을 굳이 원서로 읽겠다는 만용을 부리게 된 것은 1) 소설만 주구장창 읽어재끼던 독서 습관에 어느 정도 변화를 주고 싶었고 2) 소설 이외에 다른 인문학 책을 읽게 된다면 영어 독해 실력이 한 단계 올라가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으며 3) 벤 윌슨의 메트로폴리스를 읽고 난 후 스스로의 영어 실력에 대한 자만심이 생겼으며 4) 21세기의 지성인으로서 한 번 쯤은 모두가 이름은 알지만 읽어본 사람은 그다지 없는 책에 도전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서 의도했던 목적은 다 이루었느냐. 딱히 영어 실력도 늘지 않았고 그래 읽었으면 요약해 보시오라고 챌린지를 받으면 데꿀멍을 할 것이며 주말에는 훌륭한 수면제로 작용했으니… 딱히 이 책을 읽고 나서 훌륭한 사람이 된 것 같지는 않지만 처음부터 그럴 마음도 없었고, 의도했던 바는 이루지 못했으나 다만 읽으면서 (조는 도중에) 많은 생각은 하게 된 것 같아 몇 줄 남겨보고 싶다. 그래도 종의 기원인데… 읽었는데 아무 티도 안내고 가면 허전하잖아.


일단 나를 수면에 들게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다윈의 문체에 있다. 이 책이 쓰여진 19세기 중반의 교양있다고 생각되던 문체는 만연체로, 읽어도 읽어도 문장이 끝나지 않아 속으로 읽어도 숨이 차는 상황이 발생한다. 게다가 다윈이 드는 예시는 너무나 방대하고 길어, 읽다 보면 그래서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건지 잊어버리는 상황이 계속 일어난다. 앞으로 돌아가 소제목을 다시 읽었던 적이 몇 번인지. 게다가 책 안에서 수없이 인용되는 다른 학자들의 이론과 예시는 안 그래도 복잡한 내용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굳이 그 사람들의 이론까지 읽어보고 싶지는 않아서 정말정말 중요해보이는 내용만 따로 찾아보고 읽다보니 내가 왜 이러면서까지 이 책을 읽어야 하는지 상당히 현타가… 특히 나처럼 흥미 본위로 읽기 시작한 사람에게 첫 장부터 비둘기 키우는 얘기를 들이미는데, 여기서 여럿 포기하지 않았을까 싶다.


결정적으로,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이론과 예시는 (포인트만 짚어서, 더 쉽게 설명하면서) YouTube와 나무위키에서 더 짧은 시간에 얻을 수 있을 터인데, 굳이 원전을 (원서로) 찾아 꾸역꾸역 읽을 필요가 있는 것인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읽었을 때와는 다르다. [오펜하이머]에서 묘사된 여러 장면들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 언급된 내용들이었고, 책을 읽고 나서는 확실히 영화가 훨씬 더 잘 이해가 되는 효과가 있었지만, [종의 기원]은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분석하고 요약했으며, 그 위에 새로운 이론들이 수없이 쌓아 올려진 연구서 아닌가. 생각없이 집어 들었다 큰 코를 다친 나야 그렇다 치고, 하도 울궈져서 사골처럼 흐물흐물해진 이론서를 다시 재번역하고, 끊임없이 내용을 보완하며 재출간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 나와 같이 지적 허영심에 휩쓸린 것도 아닐텐데.


진화론에 대해 예~전 고등학교 때 대충 줏어들은 기억만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이 책에 담긴 과학적 정합성에 대해서는 말을 꺼낼 수조차 없다. 또한 상식조차 빈곤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 책을 어떻게 끝까지 읽을 수 있었는지를 명료하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독서 과정이 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덮었을 때 매우 좋은 독후감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이런 점들이 좋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예시들과 이론의 홍수 속에 휘말리면서, 내가 기억할 수 있었던 건 진화의 방향성이 무한한 방향으로 뻗어나간다는 것, 우리는 그저 대략적인 방향만을 가늠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커다란 진화의 흐름 안에 있는 하나의 존재일 뿐이고, 인간의 진화 방향성에 대해 단언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도태되는 인간이 아니라 자연에게 선택된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위에서야 불평처럼 써놓았지만 수많은 예시와 논거 역시 읽어보면 에세이처럼 재미있다. 아니 내가 어디 가서 19세기에 유행했던 비둘기 품종 개량에 대해서 알 수 있겠냐고… 또한 당시의 지질학에 대한 한계를 지적하는 장에서는 (당시 기준의) 과학의 한계와,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타 분야의 공부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것 역시 흥미깊었다. 게다가 이 수많은 논거와 예시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조사와 이론의 한계를 당연하게 인정하는 겸손함 역시 나에게는 꽤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결론은 무엇이냐… 스스로의 한계에 대한 겸손함, 그리고 성실함은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하는 덕목이다. 이런 덕목은 요약본에는 쓰여 있지 않다. 또한 하나의 결론을 내기 위한 수많은 준비와 실험, 실험의 한계와 이론의 불안정성, 그리고 그 후학을 위해 그 불안정성을 인정하며 다음 단계를 위해 스스로의 무릎을 꿇을 줄 아는 겸손함은 이론서와 논문을 직접 읽지 않는 이상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비전공자가 대충 읽으면서 느꼈던 감상도 너무나 거대한데, 생물학에 뜻을 둔 사람들의 감동은 얼마나 어마어마할지… 이것이 YouTube와 나무위키의 시대에 원본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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