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ing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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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X년, 모든 이야기는 시작된다-
202X년, 하나의 앱이 스레드 사용자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다.
컴퓨터, 모바일 디바이스에 설치되어 있는 앱들과 연동되어, 하루에 얼마나 몇 자의 타이핑을 했는지 통계를 내 주는 글이다. 원래는 마치 러닝 기록 앱처럼 작가들로 하여금 글 쓰는 페이스를 유지시켜주기 위한 앱이었는데, 한 두 사람의 작가들이 집필 인증 용으로 본인들의 페이스를 스레드에 올리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유행이 시작된 것이다. 오늘 하루 얼마나 글을 썼는지, 그리고 지금까지 얼마나 써 왔는지 인증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이 앱은 작가들의 필수 앱으로 등극하기 시작한다. 드래곤볼의 전투력, 블리치의 영압, 원피스의 도력과 같이 작가들의 ‘필력’이 수치화되기 시작하면서, 이 앱을 통해 측정된 집필량은 작가들간의 레벨을 나누는 기준이 되기 시작한다.
앱 제작사는 재빠르게 이 트렌드에 부응한다. 작가들 사이의 경쟁을 부추기기 위해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기 시작한다. 단순히 타이핑한 글자 수의 집계를 넘어, 각 SNS에서 받은 좋아요 수를 ‘필력’수치에 반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연동의 범위를 넓혀 SNS만이 아니라 서점 데이터에도 접근, 작가가 만든 책의 판매량과 연동의 범위를 넓혀 소위 ‘베스트셀러’를 쓴 작가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양의 보너스 필력을 수여했다. 수치로 필력이 정해진 시점에서, 작가들의 등급은 제작사가 만든 계급표에 의해 나누어졌으며, 작가들은 더 높은 등급으로 올라가기 위해 끝없는 필력의 경쟁에 몸을 던지며 더 많은 공감과 좋아요를 위해 글을 쓰고 또 썼다.
제작사가 정한 필력 계급표에서 아래에서 두 번째 등급은 ‘문필가’ 등급이다. 이 등급의 기준은 하루 5천 자, 일주일에 3만 자를 쓰는 것으로 (공백포함), 이 정도는 써야 취미생활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글을 마주하는 작가로 여겨졌다. 이 기준조차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글읊 쓴 기간이 얼마나 오래 됐는지는 상관없이 작가로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공백 포함이라고 해도 하루에 5천자는 빡빡한 조건이다. 바쁜 현대인이 하루에 5천자를 쓰는 것은 쉽지 않아, 다시금 자판을 빨리 칠 수 있도록 훈련시켜주는 속기학원이 학원가를 지배하기 시작하였으며, 속기 키보드를 집에 들여놓는 것이 작가들에게 있어 또다른 유행이 되었다. 한메타자연습이 부활했고, 롤 다이아 보다는 베네치아 10단계가 더욱 인정받는 시대가 되었다. 글쓰기 강좌의 메타는 만연체로 변화하였고, 의식의 흐름 기법이 문체의 트렌드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상과 제임스 조이스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몇 년 동안 수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SNS에 떠도는 온갖 헛소리에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하나둘씩 나타나게 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빌린 자기 독백의 수준이 점점 현실의 레벨을 벗어난 헛소리의 영역에 가까워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런 집단적 독백에 좋아요와 공감을 표시하는 반응 수는 더욱 늘어났다는 것이다. 물론 그 기저에는 품앗이 의식 - 내가 좋아요를 해 주었으니 상대도 해 주어야 한다 - 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점점 개인적이고 추상적이 되어가는 문장에 사람들이 오히려 공감을 많이 표한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점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쉬운 길을 가고 싶어하는 법. 점차 ‘필력’이 기본 교양으로 변해감에 따라 ‘문필가’ 등급은 지성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어야 하는 타이틀로 변화하였다. 바쁜 현대인은 기본 조건인 일 5천자 달성을 AI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자신의 생각과 주장, 그리고 선호하는 문체를 입력하면 적절한 헛소리가 5천자씩 쏟아져 나온다. 핵심 아이디어가 자신의 것이라면 자신의 작품이다라고하는 논리에 따라 AI를 탄 글들이 SNS를 지배하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진짜’ 작가를 가려내기 위해 사람들은 서로가 쓴 글에서 AI의 흔적을 찾아내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과 전개는 AI에서만 나올 수 있다…! 클리셰 및 관용 표현을 많이 쓴 글에서부터 마녀사냥은 시작되었으며, 오히려 생각의 단계가 잘 유추되지 않는 이상한 글들이 오리지널리티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했다. 제작사는 글 타이핑 속도를 감지하여, 인간이 쓰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 속도로 타이핑된 글은 AI가 쓴 것으로 간주했다. 천천히 쓰는 것이 작가들의 트렌드가 되었다.
AI를 걸러내기 위해 어떤 방법을 써도, 기술의 발전은 항상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었다. AI와의 수 년간간의 술래잡기 끝에 작가들이 도착한 곳은 다름아닌 원고지였다. 그렇다! 책은 종이, 결국 종이 위에 쓰는 글이 진정한 글이다. 작가들은 다시금 유투브를 검색하여 원고지 쓰는 법을 검색하고 삐뚤삐뚤 종이 위에 한 줄 한 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수많은 나무들이 소리없는 비명을 울리고, 환경단체는 무분별한 집필 트렌드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여느때처럼 무시당했다)
이번엔 속필 학원이 메타를 지배하지는 못했다. 자신의 원고를 예쁘게 찍어 올려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결국 출판사에서 읽을 수 있어야 출판이 되기 때문에, 대신 생각지도 않았던 서예학원이 사멸의 끝자락에서 부활하는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글을 써주는 기계는 아직은 발명되지 않았지만, 이미 상기했듯 기술은 항상,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빨리 곁에 다가오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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