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물결 속에 덧없이 사라지는 - [The Wager] by 데이비드 그랜
1742년 1월, 나무와 천을 얽어 많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배가 브라질 해안에 도착한다. 그 안에 타고 있던 서른 명의 선원들은 스스로를 영국 함선 웨이저 호의 선원들이라고 밝혔다.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많은 보물을 지니고 출항한 스페인 함선을 나포하기 위해 출발한 웨이저 호는, 폭풍에 휩싸여 무인도에 표류했고, 몇 명 안되는 사람들만이 가까스로 탈출하여 2,500여 마일을 항해했다고 한다. 그들은 영웅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로부터 여섯 달 후, 또 하나의 배가 칠레 해안에 도착한다. 그 안에는 세 명의 생존자만이 타고 있었으며, 같은 웨이저 호의 선원이되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여섯 달 전의 생존자들이 이야기한 것과 전혀 달랐던 것이다. 새로운 생존자들에 따르면, 먼저 도착한 자들은 다름아닌 선상 반란자들로, 배가 표류하자 선장에게 반기를 들고 자신들만 탈출해 나왔다는 것이다. 그들의 진실 공방은 군사 재판으로까지 이어지고, 누군가는 사형을 받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저자 데이비드 그랜은 2003년부터 활동한 논픽션 작가로, 그의 작품들 중 유명한 작품들로는 영화화가 된 [잃어버린 도시 Z], [플라워 킬링 문] 등이 있다고 한다. 특히 [플라워 킬링 문]의 경우 이번에 마틴 스콜세지가 감독해서 화제가 되었었는데, 아무래도 책을 먼저 읽고 나서 영화를 봐야 할 듯 하다. 아무리 영화를 길게 만든다고 해도, 어느 정도 생략과 각색은 있을 터. 근데 이 할아버지는 [아이리시맨]도 그렇고 요새 왜 이렇게 길게 영화를 만드는 거야...
16세기에 아르마다를 꺾은 이후 영국 해군의 위용이 아무리 하늘을 찔렀다 하더라도, 스페인은 여전히 바다에서는 영국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다. 작고 큰 여러 번의 전쟁이 바다를 피로 물들인 가운데, 이 책의 시기는 젠킨스의 귀 전쟁 War of Jenkins' Ear를 무대로 삼는다. 1731년 스페인 함선이 영국 함선을 나포하면서, 영국 함선의 선장 로버트 젠킨스는 한쪽 귀를 잘린다. 영국으로 돌아온 젠킨스는 왕에게 보복을 청원하였으나 7년 동안 무시당하고 만다. 1739년이 되어서야 정치적으로 전쟁이 중요해진 영국 정부는 이 사건을 끄집어내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이 전쟁은 5년 동안 이어진다.
이 전쟁의 가운데, 한 스페인 함선이 보물을 싣고 있다는 정보가 영국 정보에 들어오고, 영국 해군은 조지 앤슨 준장에게 몇 척의 배를 이끌고 해당 함선을 나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웨이저 호는 앤슨이 이끄는 선단에 속해 있었으며, 새로운 선장을 맞이하여 보물과 모험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폭풍우가 선단을 강타하기 전까지는.
웨이저 호에 어떤 일이 생겼고, 어떻게 되었는지는 사실 저 위의 두 문단으로 설명이 되지만 (사실 책 뒤표지에 나와있는 내용이라 스포일러도 아니다) 정말로 재밌는 건 저 인물들이 어떻게 되는지보다는 작가가 사건을 조명하는 방식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각자 자신들의 기록물을 통해 자신의 결백함과 상대방의 잘못을 주장한다. 또한 작가 역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보다는 순수하게 생존자들이 남겨놓은 기록에 근거하여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파악할 뿐이다. 이렇게 안과 밖에서 동일한 방식을 사용해 독자로 하여금 최대한 객관적인 시점을 유지하게 하는 테크닉이 매우 흥미로웠다.
오랜만에 읽은 역사 논픽션이었는데, 요새 하도 소설만 읽어 그런지 독후감이 매우 신선했다. 영국 해군에 대한 책인, 탐 윌슨의 [The Rise and Fall of British Navy]도 사 놓았는데 이제 그 책을 읽을 때가 온 것 같다. 탐 윌슨도 그렇고 데이비드 그랜도 그렇고, 글이 참 맛깔나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영감을 준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이유에서 시작한 전쟁 속의 수많은 승리와 패배 속에서 웨이저 호의 사건은 해프닝이 되어 버린다. 가라앉은 웨이저 호의 앙상한 잔해와도 같이, 사건의 관련자들은 결국 시간의 물결 속에 기록으로만 남게 되었다. 승리를 거머쥔 조지 앤슨은 탐 윌슨의 책에도 이름을 올리겠지만, 누가 웨이저 호의 선원들 이름을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겠는가.
(라고 얘기는 했지만, 사실 웨이저 호의 선원들 - 그리고 중요 인물들 - 중에는 존 바이런이라는 귀족이 있었다. 유명한 시인 바이런의 할아버지로, 그가 살아돌아오지 못했다면 시인 바이런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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