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 중 혼자 걸을 때 - [야행] by 모리미 도미히코

국내에서는 어느덧 절판되었으므로 스포일러는 피하지 않겠습니다.
 

모리미 도미히코는 2007년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가 서점대상을 받으면서 우리나라에 알려지기 시작하고, 요새는 조금 잊혀지긴 했지만 2010년 근방에는 그의 거의 모든 작품들이 번역되면서 국내에서도 인기를 꽤 모았던 작가입니다. 사실 그의 작품군은 (거의) 모두 교토를 무대로 삼고 있고, 교토와 일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만 아는 고유명사도 엄청 나오는 터라, 사실 우리나라에서 성공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작품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일련의 작품군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텐구라던지, 덴키브란이라던지 하는 소재들은 어지간히 일본 문화에 익숙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소재입니다. 이런 소재들이 등장함에도 우리나라의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건, 작가의 특징있는 문체가 작품 속의 교토를 실재하는 곳이 아닌 판타지 세계의 어딘가로 여겨지도록 만들었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작품군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 로 대표되는 청춘 코미디 라인, 그리고 [여우 이야기] [야행] [열대] 등의 기담 라인으로 나눠집니다. 하지만 라인에 상관 없이 각 작품들은 각각 서로 몇 가지의 요소를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본작 [야행]은 이 작품들이 서로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10년 전 같은 영어강좌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오랜만에 교토에서 열리는 진화제를 구경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만납니다. 10년 전 같은 자리에서 한 명의 여성이 실종되었고, 그 사건 때문에 멀어졌던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만나 그 동안 있었던 스스로의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작고 크게 얽혔던, 이제는 사망한 동판화 작가의 작품군 [야행]이 얽히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기묘해집니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햐쿠모노가타리, 백 가지 이야기]의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각각 괴담을 하나씩 이야기하고, 모두 이야기를 끝마치면 (혹은 100번째 이야기가 끝나면) 진짜 요괴가 나타난다는 괴담이죠. 영어 강좌 멤버들에게도 그 동안 신비한 일들이 있었고, 그 한 가운데는 사망한 작가의 판화 작품군, 그리고 그 그림에 항상 등장하는 얼굴없는 여자의 그림이 관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가 끝났을 때, 요괴 대신 세계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스포일러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 작품 내의 세계는 멀티버스였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더 이상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 구조처럼 모리미 도미히코의 작품들도 각각 다른 유니버스에서 서로 영향을 주며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멀티버스 얘기는 2024년에는 식상해져 버린 개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여전히 매력적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공교롭게도 오늘 본 [룩 백]도 그렇고, 가능성에서 오는 희망과 에너지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효과적인 아이템이었던 것 같습니다.

쓰다보니 작품 외적인 이야기로 빠진 것 같은데, 작품 자체로도 훌륭한 기담집입니다. [여우 이야기] 때도 느낀 거지만, 모리미 도미히코의 문체는 사람을 홀리게 합니다. 교토의 밤거리의 묘사는 일상적인 장소에 신비감을 불어넣고, 담담한 문체는 이야기를 한껏 섬찟하게 합니다. 이야기꾼 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작가 중의 한 명인 것 같습니다. 제 최애 작가 중의 하나에요. 그러다보니 아껴 읽느라 이제야 읽었지만...

아무도 없는 밤거리를 걷다 보면 누군가 따라온다거나, 저 어두운 하늘에서 갑자기 커다란 눈이 번쩍 눈을 뜬다거나 하는 무서운 상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드는 무서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걷는 데서 오는, 밤에 녹아드는 것 같은 고요한 기분.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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