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조건 - [어스시의 마법사] by 어슐라 K. 르 귄

산지 이십여년이 지나니 책 표지도 부서지고 난리났다..아 세월이여!
 

훗날 위대한 대마법사로 불리우는 게드가 젊었을 적, 그는 스패로호크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힘과 지식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그는 어느 날 끔찍한 그림자를 세상으로 불러내고, 심각한 상처를 입고 만다. 그 이후로 그림자는 게드의 뒤를 쫓고, 끝없이 도망치며 점점 피폐해지는 게드는 결국, 그 그림자에 맞서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머나먼 옛날...초등학생과 중학생 사이의 어딘가였다. 그 당시에는 판타지 장르에 대한 엔트리 포인트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반지의 제왕]이 [반지전쟁]으로 소개되고, [드래곤랜스] 시리즈가 중역된 해적판으로 소개되었던 시절이라 (여기서 연식이 나온다) 판타지 장르를 이해하려면 꼭 읽어야 하는 도서 리스트 같은 게 돌던 시절이었고, 이 책은 [반지전쟁]과 같이 그 리스트의 수위에 항상 올라 있었다. 

다만 판타지는 무협지 아래의 취급을 받던 시절이라 (...) 시골 서점까지는 판타지 소설이 들어오지 않았고, 세계 문학 이런 타이틀로 들어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는 번역의 질을 따지는 것은 사치였던 시절이기도 했고, 영어도 안되던 시절이라 서점 한 켠에서 발견했을 때는 옳거니 하고 업어 왔고, 그 날 정신없이 읽어제꼈다. 

그 이후에 미국으로 간 지 얼마 안된 2000년 초반에 저 위의 판본을 샀고, 원문으로도 (시간은 오래 걸리었을지언정) 끝까지 완독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읽었을 때의 감동은 여전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권을 읽지 않고 지금까지 시간이 흘렀던 것은 왜였을까.

책장 한 켠에 이젠 너무나 낡아서 표지가 부스러지기 시작한 저 책을 발견했고, 다시 손에 들고 며칠 동안 읽었다. 180여 페이지밖에 되지 않았지만 (예전 책이라 편집이 매우 타이트하게 되어 있다) 문장 하나 하나가 정성스럽게 쓰여져 있어 곱씹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예전에는 지루한 부분도 있었다고 기억했는데, 문체는 느긋할지언정 사건의 전개는 기억과는 달리 빨랐다. 그리고 가장 기억에 남던 클라이맥스, 그리고 엔딩의 감동은 여전했다.

분량이 그렇게 길지 않더라도 내 기억 속의 게드의 모험이 절절하게 기억되었던 이유는, 게드가 겪었던 시련이 그만큼 처절했기 때문이다. 그림자에게 공격을 받으며 입은 피해는 복구 불가한 것으로 묘사되고 (어렸을 때의 재기를 되찾았다는 직접적인 묘사가 없다) 그림자에게 쫓기면서도 여러 번 자아를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드래곤에게 승리했을 때를 제외하면 그는 그림자와의 전투에서 계속 패배하고, 마지막 순간에서야 승리한다. 혹독한 시련일 수록, 이겨냈을 때의 카타르시스도 크다.

스레드에서 누군가 요새 웹소설의 인기작들을 몇 개 꼽으며, 시간이 지나면 그 소설들도 고전이 될 수 있지 않느냐고 얘기했었다. 난 이 책을 읽으면서 갑자기 그 얘기가 떠올랐는데, 그 소설들이 고전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현 세대의 누구도 알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만큼은 고전의 반열에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고전이란 결국 오랜 시간 동안 사라지지 않고 버틴 작품들에게 주어진 칭호 같은 것이다. 오랜 시간을 살아남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면서도, 시간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더라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여러 번 읽어도 그 감동이 바래지 않으며, 읽을 수록 새로운 느낌을 주는 매력을 가진 작품. 이 책은 그런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첫 네 권이 함께 수록된 책을 주문했다. 이번에야말로 끝까지 읽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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