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허구의 경계 그 사이의 공포 - [공포소설 키리카 恐怖小説キリカ] by 사와무라 이치

 

[보기왕이 온다]는 카도카와, 이 책은 고단샤. 이것도 흥미있는 포인트였다.

공포, 또 다시 찾아온다. 데뷔작 [보기왕이, 온다] 뒤의 전율의 무대. 아, 가장 사랑하는 아내마저도……. 유수의 문학상을 받은 작가들이 심사위원을 맡은 신인문학상을 받게 된 [나]. 그런 내 옆에는 가장 사랑하는 아내 키리카. 작가 데뷔는 순풍에 돛을 달은 것처럼 진행될 거라 생각했지만, 친구가 작품을 곡해하고 만다. [작가는 인격파탄자들이다] [작가란 불행해야만 한다]라고 일방적으로 망상을 나에게 밀어 붙이고, 집요한 괴롭힘이 시작된다. 그 결과 나는 숨겨야만 하는 아내의 비밀을 지킬 수가 없게 되어 버린다……이것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사이코 호러! 

사와무라 이치는 [보기왕이 온다]로 22회 일본 호러대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작가다. [보기왕이 온다] [즈우노메 인형] 등의 이른바 [히가 자매 시리즈]를 비롯하여 [아름답다 추하다 당신의 친구] [예언의 섬] 등의 스탠드얼론 작품들을 활발하게 발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대부분의 작품들이 소개가 되어 있는데, 사실 이 작품을 읽기 전까지는 왠지 모르게 손이 영 가지 않았던 작가였다. 왠지 [OO의 OO]의 제목이 대부분인 데다가 요괴 나오는 표지를 달았다던가하는 점이 왠지 교고쿠 나츠히코의 아류 작가같은 느낌이라 영 손이 가지 않았다. 계속 출간되는 것을 보면 충성 독자층은 존재하는 모양인데, 백귀야행 시리즈도 새로 나오지 않고, 교고쿠 나츠히코의 이름이 국내에서 잊혀져 가는 가운데 이 시리즈를 읽는 게 이유없는 배덕감이 들었을 수도 있겠다. 사실 이 [공포소설 키리카]도 동일한 작가의 작품인 줄 미리 알았다면 구입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발단은 오랜만에 일본산 공포소설을 읽고 싶어서 아마존을 검색하고 있었는데, 내가 원했던 컨셉은 딱 이런 것들이었다. 

1. ‘지극히 일본적인’호러일 것. 

그 특유의 감성이 있지 않은가. 서양의 슬래셔물과는 다른, 알고 보니 내 등 뒤에 숨어서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 같은 그런 감성. 예를 들면 [링 1편], [착신아리], [주온], [검은 집] 같은, 사다코나 카나코의 이미지 같은 음침하고 끈적한, 논리와 고민과는 상관이 없는 사이코가 나오는 작품을 읽고 싶었다.  

2. 딱히 주제의식에 천착하지 않을 것. 

야하거나 잔인해도 좋으니, 공포소설의 본질에 충실한 소설을 읽고 싶었다. 근래 읽었던 호러 소설 중에는 호러라기보다는 다른 장르에 호러적 기호를 끼워넣은 작품들이 많았는데, 예를 들면 16회 일본호러소설대상 우수작이었던 [너와 있고 싶어,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는 (소설 자체는 좋았지만)라던지,  21회 독자상을 받았던 나이토 료의 [ON]이라던지 하는 작품들이 그랬다.   

3. 게다가 두껍지 않을 것. 

마침 굵직한 작품들을 연달아서 읽었던 터라, 각을 잡기 않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으면 좋겠다. 

…해서 뭐 괜찮은 게 없을까 아마존을 뒤적이던 중 딱 이 책이 추천 리스트에 떴다. 일단 표지부터 맛이 간 듯한 데다가 (…) 제목부터가 야심차게 [공포소설]임을 표방했고, 무엇보다 일본 아마존에서 포인트 백을 절반 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 이 정도면 원하던 작품상에 맞아 떨어져서 구입. [보기왕이 온다]의 작가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초반에는 당황했지만, 전반적으로는 매우 만족스러웠던 독서였다. 

이 소설은 세 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각 다른 캐릭터들의 시점에서 시간대별로 쓰여졌다. 첫 번째 챕터는 [보기왕] 이라는 작품으로 신인상을 수상한 작가 [카가와 하야키]의 시점에서 쓰여진다. [사와무라 덴지]라는 필명으로 응모했던 그는 새로운 필명으로 [사와무라 이치]를 고르고, 아내 키리카의 도움을 받아 전면적인 개고에 들어간다. 카가와는 수상 소식을 함께 소설 집필 동아리에 공유하는데, 축하해 주는 동료들 중 한 명에게서 불편한 인상을 받게 된다. 처음에는 웃고 지나가려고 했던 카가와였지만, 점점 그 동료의 집착이 심해지면서 결국 심각한 스토킹의 수준까지 겪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이 시작된다.

첫 번째 챕터는 상당 부분을 작가의 실화로부터 빌려왔다. 출판사에서 일한 것도, 친구가 쓰는 소설을 보고 자신도 써 보고 싶어서 집필을 시작한 것도, [사와무라 덴지]라는 필명으로 응모하여 신인상을 수상한 것도, [보기왕]이라는 타이틀을 [보기왕이 온다]라는 제목으로 개고하여 작가 생활을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소설은 실화를 충실히 옮기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시점이 바뀌어 가면서 이야기에 실화와 픽션이 혼재되기 시작한다. 

두 번째 챕터는 아내 키리카의 시점에서, 스토킹 사건 이후 일어난 일들을 수기 형식으로 다루고 있으며, 마지막 세 번째 챕터는 같은 동호회에 있던, 고등학교 때부터의 친구의 시점으로, 작가 [사와무라 이치]가 마침내 완성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스포가 될 것이므로 세세히 쓰지는 않겠다). 시점이 바뀌면서 카가와는 [사와무라 이치]로 변모해가고, 마지막 화자가 등장하는 세 번째 챕터 쯤 해서는 화자만이 아닌 독자의 시점에서도 생경한 존재가 된다. 이렇게 시점이 바뀌어 가면서 캐릭터가 멀어지는 연출은, 소설만이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전화로 타모리씨와 의논한 결과 타이틀은 [공포소설 키리카] 가 되었다. 

무서운 이야기에 “공포” 같은 말을 붙이는 일은 보통의 경우 역효과를 낼 것이다. 재밌는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거에요”라고 선언하는 사람은 없다. 마치 그런 것처럼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허들을 높여 버리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상관없다. 오히려 이 타이틀이 좋다고 생각한다. “공포소설이라고 쓴 주제에 전혀 무섭지 않았다” 라고 리뷰하는 인간이 반드시 나타나기 때문이다. “진짜 공포는 이런 게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나타나겠지. “공포소설에 공포를 느끼지 않는 내 센스가 공포스럽다“라는 찌질한 농담 코멘트를 하는 사람도. 그렇기에 [공포소설 키리카]라고 제목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더욱 더 쓸모있어지게 되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작가의 현실과 픽션을 섞는 솜씨가 탁월하다는 점이다. 작가는 초반 챕터의 대부분을 수상 이후 [보기왕]을 개고하여 출간 준비를 하는 부분에 할애하는데, 간헐적으로 나오는 실제 작가들 (아야츠지 유키토라던지, 교고쿠 나츠히코라던지)의 이름과 함께 꽤 충실하게 묘사한다. 이런 충실한 묘사는 이야기가 진행되며 슬쩍슬쩍 불길한 전조가 등장하더라도, 독자들의 시점을 현실에 단단히 붙들어매주는 역할을 한다. 

    중반부터는 데뷔 이후 [사와무라 이치]의 책에 붙여진 혹평들 (혹은 악플)들이 중요한 소재가 되는데, 혹평들을 읽어보면 꽤 리얼한 느낌이라, 실제로 누군가 적었던 악플을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그 악플을 썼던 사람이 이 책을 읽었다면 밤에 잠을 못잤을듯) 이렇게 본인에게 불쾌할 수도 있는 내용들을 가져왔다는 것도 이 소설의 현실감을 끌어올리면서, 자칫 허황될 수도 있는 픽션 부분의 허황됨을 무마해주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 후기까지 읽고 난다면 (이 작품은 후기, 그리고 그 뒤까지 읽어야 끝까지 읽은 것이다) 이 작품이 픽션인 것을 작가도 알고, 독자도 알고, 캐릭터들도 알겠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 “…설마?” 라는 섬찟함, 그리고 찜찜함을 안겨주게 된다. 

    결론은 수작. 가볍게 시작했지만 책에서 손을 떼지 못했고, 꽤 진을 빼며 읽었다. 상기했었던 내가 원하던 컨셉에 딱 맞는 작품이었다. 잔인한 묘사가 많아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의 정발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공포소설로는 탁월한 수준이라, 만약 나온다면 추천하고 싶다. 내 안에서의 작가 사와무라 이치에 대한 인식을 단번에 바꿔주었으며, 시간이 되는 대로 [보기왕이 온다]부터 시작해 보려고 한다.  

작가의 팬이라면 작가에 대해 조금은 더 잘 알 수 있는 작품이고, 처음으로 사와무라 이치를 접하는 독자에게도 좋은 엔트리 포인트가 된 듯.  

…절대 악평을 쓰기 찜찜해서 좋은 이야기만 쓴 것은 아니다. (이렇게 한 마디를 더 하게 만드는 것이 이 작품의 테마인 것 같다) 

사족) 

작가는 기시 유스케의 (비뚤어진) 팬인지 안티인지, 중간에 뻘하게 터진 장면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제일 싫었던 장면이자, 제일 좋았던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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